중세유럽 임금 차이 부른 건 ‘이동의 자유’ 선택 가능해질때 달라지는 임대료-소득 빚과 높은 집값에 절망하는 한국 청년들 인프라 집중 막고 시장투명성-공정성 높여야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중세를 휩쓸었던 흑사병이 끝났을 때 유럽의 노동인구는 크게 줄어 있었다. 노동자들 임금은 어찌 됐을까. 땅은 그대로인데 일할 사람이 줄었으니 임대료가 떨어지고 임금이 오르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제로 영국 등 서유럽에선 노동소득이 올랐고 불평등이 완화되며 봉건제가 몰락했다. 그러나 동유럽에선 반대로 농노제가 강화되고 근로자들 처지는 악화됐다. 인구가 줄어든 건 똑같은데 왜 어떤 곳에선 노동소득이 늘고 다른 곳에선 줄었을까.
‘불평등의 역사’를 쓴 발터 샤이델에 따르면 서유럽에선 소작농이 ‘이동의 자유’, 즉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농장으로 옮길 자유가 있었다. 농지를 빌려 경작해줄 사람이 떠날 수 있는 상황에서 임대료는 낮아지고 노동소득은 늘었다. 부역 의무도 점차 사라졌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지주와 귀족 지배층이 소작농을 땅에 얽어매는 장치들을 더욱 강화해 이동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노동소득 상승을 억제하고 노역 의무를 늘렸다.
노동인구가 줄자 서유럽에선 임금을 올린 반면, 동유럽에선 적은 수의 농노에게 더 많은 땅을 경작하게 해 착취를 강화하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동유럽 지배층이 더 악했던 건 아니다. 서유럽에서도 임금 억제 시도가 많았고 당대 지식인들은 “교만해진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적으면서 최고의 급료를 요구한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서유럽에선 귀족 특권에 맞선 민란이 일어나고 지배층의 양보가 있었던 반면, 동유럽에선 특권층의 힘이 너무나 강했다. 특히 이동의 자유를 빼앗는 강력한 수단으로 빚이 널리 활용됐다.
전 세계적으로 지대추구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사람들은 기득권이 없는 청년들이다. 이들은 엄청난 빚을 져 집을 마련하고 평생 빚 부담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하는 미래에 절망한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 더 심각하다. 미국 시카고에선 우리 돈으로 3억 원짜리 집이 3억4000만 원으로 올라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라면, 한국 서울에선 이미 9억 원인 집이 또 10억 원으로 올라 젊은이들이 끝없는 절망에 빠져드는 것이 문제다.
집을 나중에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영끌’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지만, 아예 가족 형성을 포기하고 떠돌이처럼 사는 청년들이 많다. 금수저가 아닌 청년은 삶의 필수조건인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평생 자기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내놓아야 하는 시대다.
인구는 줄고 주거공간은 느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중요한 것은 실질적 자유다. 다른 곳으로 옮겨갈 자유가 실질적으로 제한되면 청년들은 과거 동유럽 농노처럼 지대추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저렴한 도시로 옮기고 싶어도 부부가 맞벌이할 큰 노동시장, 자녀의 미래를 좌우할 교육 인프라, 건강을 챙겨줄 의료 인프라가 한곳으로만 집중되는 현실에선 실질적인 이동의 자유는 줄어든다.
반면 땅 부자 임대인의 자유, 즉 원하는 임대료 아래로는 부동산을 임대하지 않고 비워둘 자유는 초저금리와 세계적으로 낮은 실효 보유 비용, 각종 예외 조항들로 인해 더 커졌다. 임대료가 쉽게 떨어지지 않고 집값도 잡히기 어려운 환경이다.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