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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요금 고지서엔 ‘자유’가 없다[오늘과 내일/박용]

입력 | 2021-07-07 03:00:00

공급자 맘대로 일방적 청구
수신료, 요금제 선택권 줘야



박용 경제부장


한국전력에 걸려오는 전기요금 민원의 상당수는 전기와 관련이 없는 TV 수신료에 대한 불만이다. KBS가 TV 보유 가정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1994년부터 전기요금 고지서에 수신료를 함께 청구하는 통합징수 제도가 시작됐다. 모든 사람이 시청자라고 가정하고 수신료를 일방적으로 청구한 다음에 TV가 없다는 걸 입증한 사람만 면제하는 ‘옵트아웃(배제선택)’ 방식이다.

“TV가 없다”는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한 구닥다리 방식이어서 민원이 발생한다.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독립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TV가 없는데도 수신료를 내라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고 한전에 항의한다. 지난해 역대 최다인 3만6273가구가 수신료를 환불받은 건 1인 가구 증가 등 인구구조 변화와 디지털 매체 증가, 시대 변화에 뒤처진 징수 방식 등과 관련이 있다.

이런데도 KBS 이사회가 수신료를 월 2500원에서 3800원으로 52% 올려야겠다고 의결한 건 패착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힘겨워하는 국민들에게 33조 원의 추가경정예산(추경)까지 편성해 지원금 등을 주는 마당에 한 달에 1300원씩, 연간 수천억 원이 넘는 돈을 수신료로 더 걷겠다는 건가.

이달부터는 월 200kWh 이하 전력을 사용하는 625만 가구의 주택용 전기요금 필수사용공제 할인액이 월 4000원에서 2000원으로 줄어든다. 2000원이 오르는 셈이다. 여기에다 국회가 KBS가 요구한 수신료 인상안(1300원)까지 덜컥 통과시켜 주면 이들은 한 달에 3300원을 더 내야 한다. 소비자물가가 치솟아 전기요금마저 2개 분기 연속 동결됐는데 같은 고지서의 수신료만 이렇게 파격적으로 올릴 수 있는가.

수신료와 전기요금의 불편한 동거는 관련이 없는 두 요금을 한 틀에서 움직이게 만든다. KBS가 수신료를 올리려면 직접 소비자 선택을 받는 게 정석이다. 두 요금을 한 번에 떼어내기 어렵다면 전기요금 고지서로 받는 수신료는 최대한 내리고, 나머지는 KBS가 직접 소비자들을 설득해 걷게 할 수도 있다.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함께 내는 게 편한 사람만 전기요금 고지서로 청구하게 선택권을 주는 ‘옵트인(승인선택)’ 방식으로 바꾸면 불만이 줄어들 것이다.

전기요금 고지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숨은 요금이 또 있다.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 사용으로 늘어난 신재생에너지 의무이행 비용이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 비용, 석탄발전 감축 비용 등의 기후환경 요금이다. 가정에서 내는 전기요금의 약 4.9%를 차지한다. 전력 생산비가 저렴한 원전을 줄이고 비싼 신재생에너지를 더 쓰면 비용이 늘어난다. 탈원전과 탄소제로를 서둘러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각성한 ‘친환경 엘리트’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좀더 부담할 수 있게 ‘녹색 프리미엄’ 선택권을 확대하는 건 어떤가.

통신요금은 다양한 요금제가 있는데, 가정용 전기요금만 요금제 선택권이 없다. 전력 공급과 수요에 따라 요금제를 다양하게 만들고 이용자들이 생활 방식에 맞게 선택하게 해주면 어떨까. 전력 수요도 분산되고 소비자 부담도 덜어줄 수 있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의존도가 커진 제주는 육지와 달리 낮에 전기요금이 싸다. 제주는 9월부터 시간대에 따라 요금을 달리하는 선택요금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제주도처럼 스마트 계량기를 보급하면 못 할 일도 아니다. 소비자 선택권을 박탈한 공급자 중심의 행정편의 전기요금 고지서를 뜯어고칠 때가 됐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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