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에 취약한 전봇대 매년 증가 부처 간 높은 칸막이가 핵심 원인
박형준 도쿄 특파원
일본 시즈오카현 아타미시는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온천 휴양지다. 이달 초 기록적 폭우가 내리면서 3일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이가 30명 가까이 된다. 기자는 이번 사태에서 아타미 인근 4000여 가구의 ‘정전’ 피해를 가장 주목한다. 산사태를 미리 예방하기는 힘들 수 있지만 정전은 충분히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선을 땅에 묻고 전봇대를 없애는 지중화(地中化)를 했으면 말이다.
아파트 창밖을 내다봤다. 기자는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에 있는 아파트 14층에 사는데, 서울로 치면 동작구 정도 위치에 해당한다. 도심 속에 수많은 전봇대가 보인다. 큰 도로만 전봇대가 없을 뿐이고 한 블록만 떨어져도 골목 구석구석 전봇대가 솟아 있다. 서로 얽힌 전선과 통신선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2017년 말 일본 국내외 주요 도시의 지중화 비율을 조사했다. 도쿄도는 5%에 불과했다. 일본의 47개 광역지자체 중 도쿄도의 지중화 비율이 가장 높은데 그 수준이다. 지방은 1, 2%에 그쳤다. 당시 서울은 49%, 타이베이 96%, 런던과 파리는 100%로 조사됐다.
지금까지도 전봇대를 없애지 못한 것은 비용과 시간문제 때문이다. 도로 1km에 설치된 전봇대를 지중화하는 데 공사비는 5억3000만 엔(약 55억 원), 공사 기간은 평균 7년 걸린다. 안 그래도 일본은 도로가 좁은데, 공사 기간까지 길다 보니 상가 주인들은 대체로 지중화에 부정적이다.
국민 인식도 지중화를 막고 있다. 일본인은 태어나서부터 주변에서 워낙 많은 전봇대를 보다 보니 위화감이 별로 없다. 재해 때 대규모 정전 사태를 겪으면 지중화 여론이 반짝 일어나다가 곧 사라진다. ‘지중화에 쓸 돈을 복지에 사용해 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본은 자연재해의 나라 아닌가. 산사태뿐 아니라 지진, 홍수, 태풍, 지진해일(쓰나미) 등 거의 모든 재해 때마다 전봇대가 쓰러져 도로를 막고, 정전 피해가 일어난다.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밀어붙였다면 분명 전봇대를 없앨 수 있었다. 실제 일본 정부는 2016년 지중화추진법을 시행하며 지중화에 본격 나서면서 매년 약 1만5000개의 전봇대를 없앴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 생기는 전봇대가 연간 7만 개다. 지중화 사업에도 불구하고 매년 일본 전국의 전봇대가 늘어나는 것이다.
행정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부처 간 칸막이 영향이 크다. 도로는 국토교통성, 전력은 경제산업성, 통신은 총무성이 담당한다. 정부 차원에서 어디에 얼마나 새 전봇대가 생기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다(요미우리신문 5월 3일 보도). 국토교통성은 올해 들어서야 전봇대의 신설 지역과 용도를 처음 조사하고 있다. 전봇대를 없애겠다면서 신설 현황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