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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박형준]日 전봇대 미스터리

입력 | 2021-07-13 03:00:00

자연재해에 취약한 전봇대 매년 증가
부처 간 높은 칸막이가 핵심 원인



박형준 도쿄 특파원


일본 시즈오카현 아타미시는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온천 휴양지다. 이달 초 기록적 폭우가 내리면서 3일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이가 30명 가까이 된다. 기자는 이번 사태에서 아타미 인근 4000여 가구의 ‘정전’ 피해를 가장 주목한다. 산사태를 미리 예방하기는 힘들 수 있지만 정전은 충분히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선을 땅에 묻고 전봇대를 없애는 지중화(地中化)를 했으면 말이다.

아파트 창밖을 내다봤다. 기자는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에 있는 아파트 14층에 사는데, 서울로 치면 동작구 정도 위치에 해당한다. 도심 속에 수많은 전봇대가 보인다. 큰 도로만 전봇대가 없을 뿐이고 한 블록만 떨어져도 골목 구석구석 전봇대가 솟아 있다. 서로 얽힌 전선과 통신선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2017년 말 일본 국내외 주요 도시의 지중화 비율을 조사했다. 도쿄도는 5%에 불과했다. 일본의 47개 광역지자체 중 도쿄도의 지중화 비율이 가장 높은데 그 수준이다. 지방은 1, 2%에 그쳤다. 당시 서울은 49%, 타이베이 96%, 런던과 파리는 100%로 조사됐다.

일본에 왜 전봇대가 많을까.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빠른 전기 공급을 위해 허허벌판에 전봇대를 일시에 세웠다. 미국과 유럽이 경관 등 이유로 전봇대를 임시로 가설하는 것과 발상 자체가 달랐다. 일본 전역에 전봇대가 많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지금까지도 전봇대를 없애지 못한 것은 비용과 시간문제 때문이다. 도로 1km에 설치된 전봇대를 지중화하는 데 공사비는 5억3000만 엔(약 55억 원), 공사 기간은 평균 7년 걸린다. 안 그래도 일본은 도로가 좁은데, 공사 기간까지 길다 보니 상가 주인들은 대체로 지중화에 부정적이다.

국민 인식도 지중화를 막고 있다. 일본인은 태어나서부터 주변에서 워낙 많은 전봇대를 보다 보니 위화감이 별로 없다. 재해 때 대규모 정전 사태를 겪으면 지중화 여론이 반짝 일어나다가 곧 사라진다. ‘지중화에 쓸 돈을 복지에 사용해 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본은 자연재해의 나라 아닌가. 산사태뿐 아니라 지진, 홍수, 태풍, 지진해일(쓰나미) 등 거의 모든 재해 때마다 전봇대가 쓰러져 도로를 막고, 정전 피해가 일어난다.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밀어붙였다면 분명 전봇대를 없앨 수 있었다. 실제 일본 정부는 2016년 지중화추진법을 시행하며 지중화에 본격 나서면서 매년 약 1만5000개의 전봇대를 없앴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 생기는 전봇대가 연간 7만 개다. 지중화 사업에도 불구하고 매년 일본 전국의 전봇대가 늘어나는 것이다.

행정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부처 간 칸막이 영향이 크다. 도로는 국토교통성, 전력은 경제산업성, 통신은 총무성이 담당한다. 정부 차원에서 어디에 얼마나 새 전봇대가 생기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다(요미우리신문 5월 3일 보도). 국토교통성은 올해 들어서야 전봇대의 신설 지역과 용도를 처음 조사하고 있다. 전봇대를 없애겠다면서 신설 현황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이제 슬슬 태풍이 오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또다시 일본 각지에서 수많은 정전 피해가 일어날 것이다. 전봇대가 한꺼번에 쓰러지면 단시일에 일으켜 세우기 힘들어 정전 피해는 오래 지속된다. 대형 화재와 감전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부처 간 칸막이가 높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