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콜하스가 1994년 설계한 프랑스 ‘보르도 주택’의 외관(위 사진). 마치 콘크리트 덩어리가 중력을 거부하고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인다. 사고로 몸이 불편해진 의뢰인을 위해 설계된 이 건축물은 내부에 거대한 엘리베이터와 같은 움직이는 방을 갖추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사과는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천재들의 상징과도 같다. 스피노자, 앨런 튜링, 스티브 잡스 등 떠오르는 사람이 많지만 아무래도 사과 하면 뉴턴이고, 뉴턴 하면 만유인력이다. 땅이 끌어당기는 힘, 만유인력과 지구의 회전으로 생기는 원심력의 합이 중력이라고 오래전에 배웠다. 인간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은 중력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또한 거스를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획기적인 기술 발전을 자랑하는 현대건축도 중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만든 단순한 고인돌부터, 딱딱한 박스 형태를 벗어나 막 출발하려는 우주선, 혹은 마치 바다 생명체처럼 요란한 형태로 지어진 공항이나 스타디움(자하 하디드의 건축)도, 지진으로 방금 기울어진 듯한 형태의 극장(피터 아이젠먼의 건축)에서도 중력을 거스르고 싶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중력은 인간의 숙명이자 건축의 숙명이다. 간혹 애니메이션에서 하늘에 떠 있거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성채가 등장하듯, 건축에서도 ‘걸어 다니는 도시(walking city)’ 같은 스케치(건축가그룹 아키그램)를 통해 중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열망을 표현하곤 한다. 가령 김연아 선수의 아름답고 화려한 도약이라든가 발 대신 팔로 거꾸로 몸을 지탱하면서 회전하는 비보이들의 시원한 동작은 보는 사람들까지도 잠시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듯 자유로움을 맛보게 해준다. 그러나 건축에서는 근본적으로 그런 틈이 허용되지 않는다.
건축은 대지로부터 위로 솟아오르는 높이가 높을수록, 부피가 클수록 건물 자체의 하중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내내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고 바람과 지진 등 자연의 움직임까지 모두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건물 벽이나 기둥이 두꺼워야 더욱 튼튼하고 안전할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진다. 반면 건축가들은 좀 더 가볍고 유연하고 존재감을 줄이는, 심지어 움직이는 건축을 구현하고자 한다. 당대의 기술과 아이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중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령 수평의 바닥이나 수직 기둥의 각도를 기울여 얼핏 불안해 보이지만 보다 역동적인 느낌을 만들어낸다든가, 강도는 높지만 두께는 얇은 기둥을 숨기듯 사용해 구조의 존재감을 줄이고 매스(mass·덩어리)를 들어 올려 마치 떠 있는 듯한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디자인으로 세계 건축계를 선도하는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77)는 현대건축의 규범을 비틀어 자신만의 새로운 건축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는 ‘정신착란증의 뉴욕’ 등 여러 저작에서 기존 질서를 부정하며 약간은 삐딱하고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타입의 건축을 보여주지만 사실 그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건축가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불규칙한 기둥, 경사진 바닥, 부유하는 듯한 매스 등은 사실 ‘비건축적’이며 유희적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통해 현대건축의 지평을 넓힌 것은 확실한 그의 업적이다.
교통사고로 몸이 불편해진 의뢰인을 위해 1994년 설계한 프랑스의 보르도 주택이 대표적이다. 이 집 역시 얼핏 보면 지면에서 콘크리트 덩어리가 기둥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통사고로 휠체어를 통해 움직여야 하는 의뢰인을 위해 콜하스는 3층 규모로 단순한 외관과 복잡한 구성을 가진 집을 설계한다. 외부에서 보면 붉은 콘크리트 입방체가 둥실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는 3×3.5m 크기의 방이 수직으로 움직이며 모든 층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