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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해녀의 삶이 담긴 보말죽, 상처 보듬어준 한 입[김재희 기자의 씨네맛]

입력 | 2021-07-16 03:00:00

영화 ‘빛나는 순간’ 속 제주 보말죽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해녀 진옥(고두심·오른쪽)이 만들어 온 보말죽을 먹는 경훈(지현우). 명필름 제공

김재희 기자


단 한 줄의 설명만으로 눈길을 끄는 영화가 있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빛나는 순간’도 그렇다. ‘70세 제주 해녀 진옥과 30대 PD 경훈의 사랑 이야기.’ 이 한 줄의 문장이 시선을 사로잡는 건 듣는 순간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모성애가 아니라 멜로라고?’ ‘둘은 어쩌다 사랑에 빠질까?’

제주 해녀 진옥(고두심)의 삶을 담기 위해 경훈(지현우)은 제주를 찾고, 오랜 거절 끝에 진옥이 다큐를 찍기로 하면서 둘이 사랑하게 된다는 설명이 질문에 대한 답이지만 이는 ‘위로’라는 한 단어로도 갈음된다. 둘의 사랑은 위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이를 진심으로 보듬어줄 수 있는 이라면 모든 걸 초월한 사랑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둘의 사랑을 포착한 소재는 제주 음식 보말죽이다. 제주에서는 바다고둥을 보말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보말죽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진옥이 산송장처럼 누워 눈만 껌뻑이는 남편에게 보말죽을 먹여 줄 때다. 남편을 일으켜 세워 죽을 떠먹이고, 그의 입가에 묻은 보말죽을 닦는 장면은 평생 남편을 위로하며 살아온 진옥의 삶을 상징한다. 영화 중반, 진옥은 경훈에게 보말죽을 끓여 준다. 애써 경훈을 밀어내던 진옥은 그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말죽을 만들어 찾아간다. 푸석한 얼굴의 경훈은 보말죽을 먹으며 말한다. “보말죽, 처음 들어봐요. 엄청 맛있네.”

진옥은 살갑게 웃는 경훈의 얼굴 뒤 그늘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다에서 잃은 공통점이 있기에. 각본을 쓰고 연출한 소준문 감독(42)은 전화 인터뷰에서 “상처를 가진 사람은 또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알아본다. 진옥은 경훈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상처를 알았다. 그걸 보듬어주는 첫걸음을 내디딘 게 보말죽 장면이다”라고 했다.

서울 중구 충무로에 1968년 문을 연 ‘송죽’에서 파는 보말죽.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보말죽은 간단해 보이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보말에서 이쑤시개나 바늘로 살을 발라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살의 끝에 달린 내장을 따로 분리한 뒤 으깨서 국물을 내는 데 사용하고, 살은 쌀과 함께 볶는다. 소 감독이 보말죽을 택한 이유도 정성 때문이다. “진옥이 이쑤시개로 보말 살을 꺼내는 장면이 나오듯 보말은 수고스러운 음식이에요. 경훈을 향한 진옥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1968년부터 서울 중구 충무로 골목을 지켜온 ‘송죽’은 서울에서 보말죽을 파는 몇 안 되는 곳이다. 파독 간호사였던 첫 번째 사장이 80세가 넘으며 운영이 어려워지자 2010년 강민정 씨(46)가 가게를 인수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지역 특색을 살린 죽을 팔고자 보말죽을 메뉴에 넣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관광객이 급감해 위기를 맞은 송죽은 최근 규모를 줄여 원래 자리 인근으로 이사했다. 송 씨는 “이민을 갔다가 40년 만에 다시 송죽을 찾았다는 분, 일부러 송죽 옆에 방을 잡았다는 일본인 관광객도 있었다. 전통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에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