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0월 13일
플래시백
가끔 ‘역사는 누가 쓰는가’라는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구절이 심심찮게 거론되지만 역사는 역시 살아남은 사람이 쓰겠죠. 그렇지만 당장 역사를 강제하는 힘은 승자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습니다. 총독부는 1915년 중추원을 중심으로 ‘조선반도사’ 편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조선반도사는 통사(通史), 즉 한민족의 전체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책을 목표로 삼았죠. 하지만 ‘(조선인들을) 충량한 제국신민에 부끄러움 없는 위치로 돕고 이끌기 위하여’라는 목적을 분명히 내세웠습니다. 역사 서술이 곧 식민지 통치수단의 하나가 된 꼴이었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좁혀놓으려는 의도도 드러납니다.①1938년 6월 간행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표지 ②조선사편수회 위원장과 회장들로 모두 당시 정무총감이었다. 윗줄부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리오시 주이치, 시모오카 주지, 유아사 구라헤이, 이케가미 시로, 고다마 히데오, 이마이다 기요노리, 오노 로쿠이치로 ③조선사편수회 고문들. 윗줄부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핫토리 우노키치, 구로이타 가쓰미, 나이토 도라지로, 야마다 사부로, 이윤용, 하야미 히로시. 출처 : 독립기념관
왼쪽은 조선사편수회 일행이 충청남도 아산지방 사료조사 때 충무공 이순신의 종손집을 찾아가 찍은 사진. 오른쪽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나카무라 히데타카(오른쪽)가 이순신 종손과 함께 촬영한 사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일제가 ‘조선사’를 통사가 아니라 자료집 형태로 내겠다고 한 배경에는 능력 부족도 작용했습니다. 조선의 반만년 통사를 쓸 만한 일본 전문가가 영 부족했거든요. 당시엔 기껏해야 고대사나 일본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조선 연구가 나오는데 불과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를 지휘했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고문서학의 권위자였죠. 하지만 자료집 편찬의 바탕에는 한민족의 역사를 일본 밑에 영원히 묶어두려는 무서운 장치도 깔려 있었습니다. 마치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권력이 지방영주를 복속시켜 나갔듯이 우리 역사도 일본제국의 하위부문으로 끼워 맞추는 틀을 만들려 했던 것이죠. 일본은 중앙, 조선은 지방이라는 구도를 고정하기 위해 활용할 사료를 모아들였다는 뜻입니다.
①1925년 10월 8일 열린 조선사편수회 제1차 회의 모습 ②편수 자료를 살펴보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앞쪽) 출처 : 매일신보
‘숙신(肅愼)은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발해 같은 것도 조선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이십니까?’ 육당 최남선이 조선사편수회 제4회 회의에서 꺼낸 질문입니다. 최남선의 조선사편수회 활동은 친일 행적의 하나로 꼽힙니다. 하지만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시작을 삼국시대 이후로 잡으려는 시도에 이의를 제기했죠. 말하자면 안에서 싸운 셈입니다. 단군 연구의 대가인 최남선이었으니까 가능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사편수회는 연 월 일이 분명한 사실만 싣는다는 실증주의를 앞세워 고조선을 제외시켰습니다.
왼쪽은 최남선이 1929년 가을 함경남도 이원군 만덕산 등성이에서 발견한 신라 진흥왕 순수비. 오른쪽은 1929년 12월 1~2일 조선사편수회 주최로 열린 조선사료전람회. 이순신 자필 난중일기 초본 등 45점이 전시됐다.
1933년까지 ‘조선사’를 내겠다는 계획은 5년이 더 지난 1938년에야 35책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지방은 물론 일본 만주까지 가서 고문서 문집 영정 고지도 탁본 등을 사들였죠. 고문서만 6만1500장에 가까운 분량이 수집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펴낸 ‘조선사’는 해방 이후에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 연구자들은 ‘조선사’를 밑그림으로 해서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고 하니까요.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했던 일본 연구자들은 한국 국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의 후속기관쯤으로 볼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연구도 ‘조선사’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번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입니다.
원문
朝鮮史(조선사)는七時代(7시대)로 區分(구분)
完成(완성)은 卄二年(20년) 後(후)
總督府(총독부)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의 第一回(제1회) 會合(회합)은 去(거) 八日(8일) 開催(개최)되엿는데 編修會(편수회)의 目的(목적)은 朝鮮(조선) 古代(고대)부터 現在(현재)까지의 史料(사료)를 蒐集(수집)하야 完全(완전)한 朝鮮史(조선사)를 編纂(편찬)하랴는 大規模(대규모)의 事業(사업)인 바 그 具體的(구체적) 計劃案(계획안)으로는 朝鮮史(조선사)의 體裁(체재)、文體(문체) 史料蒐集(사료수집)의 範圍(범위)、稿本(고본) 作成(작성) 等(등)으로 分(분)하고 編年史(편년사)로는 左(좌)와 如(여)히 區分(구분)하야 編纂(편찬)하리라더라.
二(2)、三國時代(삼국시대)
三(3)、新羅時代(신라시대)
四(4)、高麗時代(고려시대)
五(5)、朝鮮時代(조선시대) 前期(전기)
六(6)、同(동) 中期(중기)(光海君·광해군 ─ 英祖·영조까지)
七(7)、同(동) 後期(후기)(正祖·정조 ─ 甲午改革·갑오개혁까지)
體裁(체재)는 爲先(위선) 綱文(강문)을 揭(게)하고 次(차)에 史料(사료)를 收錄(수록)하기토 하엿슴으로 一般(일반)은 그 綱文(강문)만 보면 史實(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 한다. 第一回(제1회)의 委員會(위원회)는 來(내) 二十二年(22년)까지 完成(완성)할 計劃(계획)을 决定(결정)하엿다는데 卽(즉) 來(내) 十五年度(15년도)부터 十六年(16년)까지 二個年間(2개년간)에 史料(사료)의 蒐集(수집)을 完了(완료)하고 十七年(17년) 以後(이후) 二十年(20년)까지 四個年(4개년)에 稿本(고본)을 作成(작성)하야 二十二年(22년)까지 修正(수정)을 終了(종료) 上梓(상재)하기로 하엿다. 그런데 史料(사료)의 蒐集(수집)에 對(대)하야는 各道(각도)는 勿論(물론) 日本(일본) 中國(중국) 各(각) 方面(방면)에 亘(긍)하야 關係(관계) 記錄(기록)을 探索(탐색)하야 謄本(등본)을 作(작)하기로 하엿다는 바 膽本(등본) 作成(작성)만 하여모 人員(인원)이 二十萬人(20만인)은 要(요)하리라고한다. 二十二年(22년) 後(후)의 此(차) 朝鮮史(조선사)는 極(극)히 浩翰(호한)한 것일 것으로 그 冊數(책수)는 幾百冊(기백책)이 될는지 아즉 不明(불명)하다더라.
현대문
조선사는7개 시대로 구분
완성은 20년 후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제1회 회합은 지난 8일 개최되었다. 편수회의 목적은 조선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사료를 수집하여 완전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는 대규모의 사업이다. 그 구체적 계획안으로는 조선사의 체재, 문체, 사료 수집의 범위, 원고 작성 등으로 나누고 편년체 역사로는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편찬한다고 한다.
1. 삼국 이전
2. 삼국시대
3. 신라시대
4. 고려시대
5. 조선시대 전기
6. 조선시대 중기(광해군~영조까지)
7. 조선시대 후기(정조~갑오개혁까지)
체재는 우선 요약문을 게시하고 다음에 사료를 수록하기로 하였으므로 일반인은 그 요약문만 보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제1회 위원회는 오는 1933년까지 완성할 계획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즉 오는 1926년부터 1927년까지 2개년 간 사료의 수집을 완료하고 1928년 이후 1931년까지 4개년에 원고를 작성하여 1933년까지 수정을 마쳐 출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 각 도는 물론 일본 중국 각 방면에 퍼져 있는 관계 기록을 탐색하여 필사본을 만들기로 하였다. 필사본 작성만 해도 인원이 20만 명은 필요하리라고 한다. 1933년 이후의 이 조선사는 아주 광대한 분량이 될 것으로 책 수는 몇 백 권이 될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