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오름이야기’ <10>
16일 오후 제주시 애월읍 해발 519m의 새별오름. 제주를 찾은 관광객의 주요 탐방 오름 가운데 하나로 1시간 정도면 여유롭게 올랐다가 내려올 수 있다. 오름 북쪽 사면은 온통 억새로 뒤덮였다. 억새 사이로 분홍빛 층층이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멍석딸기는 열매를 맺었고 실타래가 꼬인 것처럼 보이는 타래난초도 붉은빛이 선명한 꽃을 피웠다. 서쪽 사면은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인 갯취가 군락을 이루는데 꽃은 이미 졌다. 정상에는 자줏빛 반점이 선명한 말나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꽃이 만발하는 봄 시즌이 지났는데도 새별오름은 들꽃의 향연이 여전했다.
새별오름은 2000년부터 매년 들불축제를 개최하는 장소로 동남쪽 사면이 통째로 불에 태워진다. 올해 3월에도 들불축제로 오름 사면이 불태워진 이후 새 풀이 돋아났다. 들불축제는 목장의 방목지나 초지에서 진드기를 구제하기 위해 불을 놓았던 화입(火入)을 현대적 감각에 맞춘 축제로 만들었다. 제주 지역에서는 이런 불 놓기를 ‘방애’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내려온 목축 문화였으나 산불 위험성에 따라 1965년부터 금지됐다.
화입으로 지상부의 유효양분이 파괴되고 유기물 함량이 낮아지지만 들풀의 생명력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제주대 석사학위논문인 ‘화입에 의한 새별오름의 식물상 및 식생변화’에 따르면 화입지 식물상은 종, 아종, 변종, 품종 등을 포함해서 168종으로 조사됐으며 화입을 하지 않은 곳은 202종으로 나타났다. 귀화식물(우리 땅에 정착한 외래식물)인 돼지풀, 도꼬마리 등은 화입지에서만 확인됐다.
● 오름마다 특색 있는 들꽃 자생
제주의 오름에 자생하는 들꽃.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세복수초, 새끼노루귀, 변산바람꽃, 피뿌리풀, 흰털괭이눈, 현호색.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지형지질 등에 따라 오름은 저마다 특별한 들꽃을 키운다. 차가운 냉기를 뚫고 피어나는 ‘봄의 전령 3총사’인 새끼노루귀, 변산바람꽃, 세복수초는 제주시 봉개동 민오름, 절물오름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 중 새끼노루귀, 변산바람꽃은 한국 특산식물로 앙증맞은 귀여움과 다소곳한 자태를 뽐낸다. 눈을 뚫고 솟아나는 개화 현장을 포착하려는 사진가들이 애지중지하는 들꽃으로도 유명하다. 제주시 애월읍 큰노꼬메오름에서는 상산나무 군락 인근 불과 30m²가량의 면적에서 이들 3총사가 한꺼번에 꽃을 피운 장관을 볼 수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종(鐘) 모양의 산방산은 해발 395m의 오름으로 암벽식물지대가 천연기념물 제376호로 지정됐다. 정상에는 구실잣밤나무, 후박나무 등 온난한 기후에서 자라는 상록수가 서식하고 암벽에는 지네발란, 풍란, 석곡 등 희귀식물이 자생하는 등 학술연구 자원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제주시 한경면 수월봉, 서귀포시 안덕면 월라봉과 대정읍 송악산 등 해안가에 위치한 오름에서는 해국, 갯쑥부쟁이, 번앵초 등 염분에 강한 들꽃이 자생하는 특징이 있다. 서귀포시 표선면 따라비오름은 가을 억새로 파도치듯 물결친다.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꽃은 낭만적인 감성을 불러온다.
제주시 구좌읍 아부오름, 높은오름 등에 자생하는 피뿌리풀은 산림청과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종이다. 몽골, 중국 북부, 러시아 등지에 자생하는 피뿌리풀이 제주의 오름에 정착한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 말 원나라가 1274년부터 100년가량 제주를 지배하면서 목장을 운영할 당시 몽골에서 들여온 말이나 물품 등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희귀성 때문에 수난을 당했다. 도채꾼들이 몰래 캐가면서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지금은 오름에서 보이지 않아 야생 상태에서는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
● 인위적 개입, 자연적 천이로 오름 식생 변화
제주의 오름은 특이한 지형지질과 기후 등으로 다양한 들꽃이 자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제주시 구좌읍의 안돌(위), 밧돌오름은 키 작은 단초식물이 자생하는데 우마 방목의 중단으로 점차 나무들이 점거하면서 새로운 종의 식물로 교체되는 천이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생물 종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한 오름에 대한 식물 조사는 드물었다. 유네스코(UNESCO) 세계자연유산 지정 신청이나 곶자왈(용암 지대에 형성된 숲)을 연구하기 위해 간혹 조사가 진행된 정도였다. 오름만을 대상으로 한 학술적인 식생 조사는 2012년 호남대에서 진행한 ‘제주시 일대 오름의 식물 다양성과 보전 방안’이 시초로 보인다. 수산봉, 원당봉, 안세미, 천아오름, 큰노꼬메 등 모두 18개 오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54종이 나왔다. 한국 특산식물로 개족도리풀, 새끼노루귀, 벌깨냉이 등 14종이 확인됐으며 지극히 한정된 지역에만 자생하는 식물은 목련, 한라돌쩌귀, 갯취 등 14종으로 나타났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는 2019년부터 2020년까지 금오름, 안돌오름, 용눈이오름, 입산봉, 절물오름, 지미봉, 체오름, 다랑쉬오름 등 제주시 지역 8개 오름과 당오름, 물영아리, 민머루오름, 병곳오름, 수악, 원수악, 자배봉, 하논 등 서귀포시 지역 8개 오름에 대한 식물상을 조사했다. 자생하는 식물은 763종으로 나타났으며 멸종위기종인 솔붓꽃을 비롯해 옥녀꽃대, 야고, 제주상사화, 땅나리 등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은 12종으로 조사됐다. 이들 오름 가운데 다랑쉬오름 식물이 297종으로 가장 많았다.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서연옥 박사는 “무분별한 개발과 오름 탐방으로 중산간 지역의 자연생태계 훼손이 가속화하고 있다”며 “생물 종 다양성 유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오름을 보전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원하지 않은 오름, 자연 천이 과정 거치며 원래 식생 복원
전문가 “정기적인 모니터링 필요”
과거 제주 사람들은 가을이면 ‘오름이 움직인다’는 말을 했다. 오름을 뒤덮은 ‘띠’가 바람에 한들거릴 때 마치 오름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마 방목을 위해 오름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띠를 얻으려고 불을 놓기도 했다. 띠는 초가지붕, 거름 등 주민 생활에 요긴한 재료였다. 하지만 생활패턴이 달라지고 우마 방목이 줄어들면서 띠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불 놓기도 금지해 오름은 자연 천이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오름에서 방목이나 화입이 이뤄지면 꽃향유, 물매화, 잔대 등 바닥에서 꽃을 피우는 들꽃이 만발하다가 띠나 억새가 우점하면 점차 사라진다. 띠나 억새가 점령한 초지에 찔레, 청미래덩굴 등 키 작은 식물이 먼저 들어온 뒤 이어서 해송으로 불리는 곰솔이 자리를 잡는다. 종자에 날개가 있는 곰솔이 바람을 타고 이동해 햇빛이 잘 드는 초지에 숲을 이루면 초지는 물론 들꽃도 대부분 자취를 감춘다.
곰솔 숲도 영원하지 않다. 새의 배설물 등을 통해 발아한 녹나무, 참식나무, 새덕이, 후박나무, 생달나무 등 상록수가 자라기 시작하면 ‘종의 전쟁’에서 밀려나 터전을 내줘야 한다. 김명준 제주자생식물연구회 회장은 “오름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사라지면 자연 천이 과정을 거쳐 원래 식생으로 복원될 가능성이 높다”며 “오름 식생에 대한 정기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