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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이정은]스파이 드라마 속의 적, 중국

입력 | 2021-07-19 03:00:00

러시아, 北 대신 中이 적대국 등장
美中 갈등으로 드라마가 현실 될 수도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최근 베트남에서 퇴출된 호주 드라마 ‘파인 갭(Pine Gap)’은 미국과 호주가 공동 운영하는 위성 정보기지 파인 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첩보물이다. 구단선(九段線·중국이 남중국해에 임의로 그어 놓은 영해선)이 그려진 지도 한 장에 베트남 시청자들이 발끈해 드라마 방영을 중단시키면서 주목을 끌었다.

첩보물치고는 졸작이라는 혹평도 일부 있었지만 쿼드(Quad) 회원국이자 파이브 아이스(five eyes·주요 5개국 기밀정보 공유 동맹체)의 회원국인 호주의 대미 동맹관을 일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미 양국이 동맹 이슈로 충돌했던 지난해 워싱턴에서 근무하던 한 외교관은 “우리가 하는 고민을 인도태평양 지역의 다른 동맹국도 비슷하게 하고 있다니!”라며 위안이 된다는 듯 이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파인 갭에는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미국과의 물밑 신경전, 미중 사이에서 갈등하는 호주의 속내 등이 드라마틱하게 묘사돼 있다. 호주 측 정보요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다. 미국 측 파트너에게 “분쟁이 생기면 미국이 일본이나 한국 대신 우리를 선택할 것 같으냐?”고 냉소하는 장면도 있다. 호주 측 파인 갭 책임자는 ‘남중국해에서 미국이 군사행동에 나서고 호주가 이에 가담하게 된다면?’이라는 미국 인사의 질문에 “중국이 철광석과 쇠고기, 밀, 쌀 수출을 막을 것”이라는 말부터 꺼낸다. 호주의 농업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며 “중국은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우리를 무릎 꿇게 할 수 있다”고 화를 낸다.

가장 눈길이 갔던 부분은 스파이 드라마의 적국이 중국으로 설정돼 있다는 점이었다. 파인 갭의 위성감시 활동은 명백히 중국과 중국의 지도자를 겨냥하고 있고, 이들을 향한 미국 대통령의 경고는 거칠고 노골적이다. 미중 간 공격과 맞공격이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미국 전투기가 추락하면서 남중국해의 긴장은 급고조된다. 호주 광산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현지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중국 기업가는 음험한 모략가처럼 그려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첩보물에서는 적국이 러시아와 동유럽 공산국가, 혹은 북한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런 설정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중국을 주적으로 설정한 드라마가 나온 것은 미국의 강도 높은 ‘중국 때리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워싱턴에서 이미 만인의 적이 되다시피 한 분위기. 글로벌 패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미국의 결기 밑에는 무서운 기세로 증강하는 중국의 군사적, 경제적 역량에 대한 두려움도 스멀거린다.

현재 미중 간 뇌관이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두 나라는 산업스파이들의 정보전과 사이버 해킹 같은 분야에서도 맞붙어 있지만, 이 지역은 군사적 무력충돌 가능성이 높아지는 ‘화약고’라는 점에서 긴장의 강도가 다르다. 미국은 중국 보란 듯이 항모전단과 폭격기를 잇달아 출격시키고 있고, 중국도 거의 동시에 항공모함은 물론 각종 폭격기와 전투기 수십 대를 동원해 맞불 작전에 나섰다.

무력시위는 언제라도 우발적 충돌로 이어지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 수 있다. 펜타곤의 고위 인사들이 경고했듯 6년 내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아슬아슬한 순간들은 드라마가 꼭 가상의 상황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