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관호의 천재성을 보여준 ‘해질녘’(1916년). 1916년 도쿄미술학교 졸업미전 출품작으로 일본 최고 공모전에서 특선을 받았다. 도쿄예술대 소장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나체화 부재의 사회. 해외에서 날아온 희소식은 불행하게도(?) 그림 소재가 ‘벌거벗은 여인’이라 논란이 됐다. 뒷모습인데도 야단이었으니 만약 앞모습을 그렸다면 그 충격은 어땠을까. 아무리 특선작으로 각광받았다 해도 신문에 게재할 수 없는 유교 문화의 나라였다. ‘해질녘’은 평양 대동강의 능라도 부근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건장한 체구의 두 여인이 목욕하고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짜임새 있는 구도에 탄탄한 인체 묘사 그리고 온화한 색감 등 당대 사회에서는 처음 보는 화풍이었다. 서구식 유화 자체도 생소한데 소재까지 벌거벗은 여인이라니, 이는 충격 그 자체이기에 충분했다. 케네스 클라크의 분류대로 알몸(naked)과 누드(nude)를 구분하는 인식이 없을 때의 해프닝이다. 누드의 개념을 알몸과 구별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양을 동반한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인의 유화 ‘베스트 10’의 하나로 선정됐던 ‘해질녘’. 김관호는 이 작품과 ‘자화상’을 졸업미전에 출품했고, 이들 작품은 그가 다닌 도쿄예술대학에 소장돼 있다. 귀국 후 1916년 12월 국내 최초 유화 개인전으로 기록된 전시를 평양에서 개최하면서 천재성을 과시했다. 귀국 초기에는 조선미전에 ‘호수’(1923년)라는 제목의 누드 작품을 출품하는 등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삭성회(朔星會)라는 미술단체를 조직해 후학 지도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작가 생활은 불과 10여 년, 그는 1920년대 중반 절필했고 폐인처럼 잊혀졌다. 이를 두고 소설가 김동인은 천재에 대한 조선사회의 푸대접을 비판하기도 했다. 유화 수용의 선구자는 예술 천시의 사회적 환경과 작가의식 부재라는 악조건을 이겨내지 못했다.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다. 이는 고희동이나 김찬영도 비슷한 처지였다. 나체화는커녕 양반 자제가 미술을 지망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김관호의 ‘자화상’(1916년). ‘해질녘’과 함께 졸업미전에 출품했던 작품. 도쿄예술대 소장
평양발 소식 하나. 김관호의 무덤은 작고 60년 만인 2019년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 묘비에는 고인의 이름과 함께 ‘북조선예술총련맹 미술가동맹 중앙상무위원’이라는 직함이 포함됐다. 생몰연대는 1890년 11월 1일 생∼1959년 10월 20일. 애국열사릉에 묻힌 미술인은 정관철 등 몇 명 되지 않는다. 이장된 것인데, 김일성 주석의 유훈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김관호의 증손자로 재미교포인 김영민에 따르면 화가는 생전에 김일성 주석 저택으로 초청받아 식사 대접을 받고 미술도구를 선물 받았다. 김일성은 그가 위대한 화가이니 유족들을 잘 보살피라는 유훈도 남겼다고 한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은 북한 국보로 지정한 김관호의 ‘채전에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북한은 그를 ‘민족의 넋을 지킨 미술가’로 재조명하고, 그 사업의 하나로 ‘김관호 평전’ 출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경색된 남북관계를 생각해보면, 정치는 몰라도 문화예술은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냉전시대 미국과 옛 소련은 가장 먼저 미술품 교류전을 열어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 개인전을, 워싱턴에서는 옛 소련 소장 인상파 미술전을 각기 볼 수 있었다. 미술 장르의 장점을 살린 결과였다. 그렇다면 언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을 서울에서 전시할 수 있을까. 남북 미술 교류는 공식적인 차원에서 기관 대 기관으로 격상해서 추진해야 한다. 김관호 유작을 비롯해 근대기 작품은 남북 통합미술사 기술을 위해서라도 남북이 공유해 보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미술이 역할을 할 기회는 과연 언제 올 것인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