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한국산 아이돌] 〈2〉무대로 가는 길
곡 발매가 곧 대기록 경신을 뜻하는 방탄소년단(BTS) 같은 스타에게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연습생 시절이 있었다. 담보된 미래 없이 긴 터널을 지나야 하는 연습생들은 그 무게에 무너지지 않으려 연습에 더욱 몰두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어서 원망할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꿈뿐. 고통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 역시 바로 그 꿈이다. 연습실이 삶의 전부였던 지난 9년…. 한 걸그룹 연습생의 ‘무대로 가는 길’을 따라가 봤다.
5월 18일 쇼케이스 무대에서 무대용 이어폰을 점검하고 있는 걸그룹 ‘트라이비’ 멤버 송선.
2016년 2월 서울 송파구 한림연예예술고 졸업식은 외부인들로 유난히 북적였다. 이날 이 예고를 졸업하는 아이돌들을 보기 위해 팬과 기자들이 몰렸다. 학교 안에는 연예대상 시상식 때처럼 레드카펫이 깔렸고 포토월이 설치됐다. 데뷔에 성공한 졸업생들은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 중에는 유명 아이돌이자 배우인 차은우도 있었다. 학교는 재학 중 데뷔한 학생들에게 학교를 빛냈다며 공로상을 줬다.
이날 이들과 함께 졸업하는 송선은 단상에 오른 친구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졸업식 날 공로상을 받는 모습은 송선이 지난 3년 간 꿈꿔온 장면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에 시작해 5년째로 접어든 연습생 생활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송선이 5월 18일 쇼케이스 무대 리허설 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반갑지 않았던 스무살
예고를 졸업한 뒤에도 송선은 매일 연습실에 있었다. 소속사에 새로 들어온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연습실 복도를 뛰어다녔다. 매니저가 송선을 불렀다.
“여기 회사인데 애가 저렇게 떠들고 뛰어다니게 놔둬도 되겠니?”
송선은 당황했다. 막내 생활을 오래 하면서 그 역시 회사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깔깔대며 웃곤 했다.
앨범 자켓 사진 촬영을 앞두고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송선.
두 달 전 스무 살이 된 송선은 이제 연습생 중 유일한 성인이었다. 처음 데뷔조에 들었던 고교 1학년 때만 해도 송선은 팀에서 막내였다. 팀 이름 후보를 정해보고, 곡 녹음도 했지만 기획사는 언제 데뷔하는 지 말해주지 않았다.
“빨리 데뷔해야 하는데….” 언니들은 불안해했지만 송선에게는 “너는 아직 어리니까 괜찮아”라고 말하곤 했다. 학교와 연습실을 오가는 생활을 하는 동안 송선은 어느새 데뷔를 못한 채 20살을 맞았다. 언니들이 느꼈던 불안감은 이제 자신의 것이 됐다.
송선은 그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이돌이 대부분 어리잖아요. 아무래도 성인이라는 게 좀…. 나이 많아서 이제 아이돌 못 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됐어요.”
송선이 개인 보컬 연습실에서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러 번 데뷔조에 들며 ‘희망고문’을 당하는 깜깜한 터널이 이어지는 동안 송선이 할 수 있는 것은 실력을 키우는 것뿐이었다. 데뷔조 멤버를 짜는 것도, 데뷔 시점을 결정하는 것도 송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데뷔가 여러 번 무산될수록 “더 완벽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해 연습에 몰두했다. 연습생이 되기 전까지 춤을 제대로 춰본 적이 없었던 송선은 어느새 군무를 능숙히 소화하고 있었다. 송선이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은 월말 평가에서 준비한 단체 군무를 선보이는 멤버들과 합이 잘 맞을 때였다.
자체 콘텐츠 촬영을 마친 ‘트라이비’ 멤버들이 막간을 이용해 연습실에서 군무를 맞춰보고 있다.
매일 아침이 되면 체중계에 찍힌 몸무게를 휴대전화로 촬영해 기획사에 보내야 했다. 월말 평가 때마다 “볼살 좀 빼라”는 얘기가 듣기 싫어 닭가슴살 한 덩이만 먹고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발에도 살이 빠져 신발 사이즈가 235mm에서 225mm로 줄어드는데도 젖살인 볼살은 끝내 빠지지 않았다. 살을 아무리 빼도 사진을 제출해야 하는 연습생의 의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나 싶은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찾아왔다.
‘트라이비’ 멤버 켈리(뒤)와 미레(앞)가 필라테스 레슨을 받고 있다.
춤 연습 중인 ‘트라이비’의 일본인 멤버 미레는 세계적인 아이돌 가수가 되고 싶어 중학생 때 한국에 왔다.
“저 그냥 음악 할래요. 아이돌 안 해도 돼요”
8년을 기다린 송선에게 지난해 초 또다시 데뷔 기회가 왔다. 글로벌 음반사인 유니버설뮤직이 참여한 새 걸그룹 ‘트라이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데뷔조가 꾸려지는 동안 송선은 웃음을 잃어갔다. 아직 멤버가 추려지지 않아 참여하기로 한 연습생은 10명이 훌쩍 넘었다. 대부분은 어리고 연습 기간도 짧았다. 송선이 그 나이 때 그랬던 것처럼, 어린 연습생들은 자기만큼 절박해보이지 않았다. 작은 것에도 웃고 즐거워했다. 10대 때의 송선이라면 ‘저 나이엔 그럴 수 있지’라며 넘겼겠지만, 이제는 잡담할 시간에 혼자서 춤 한 동작이라도 더 춰봐야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이 계속되면서 외국인 연습생들이 비자 문제로 자국으로 간 뒤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제일 중요한 군무를 맞춰볼 수 없었다. 밀리고 밀렸던 데뷔가 또 늦어지는 것 같았다. 데뷔의 문턱을 넘지 못할 때마다 “반드시 데뷔한다”고 마음을 다잡아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트라이비’ 멤버의 사물함 안에 고졸 검정고시 학습서가 놓여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지난해 가을 보컬 수업을 받다가 송선은 보컬 트레이너 김제이미에게 말했다.
“저 안하고 싶어요. 방송에 안 나와도 되고 그냥 음악하고 싶어요. 아이돌 안 해도 돼요.”
김제이미는 차마 말릴 수 없었다. 3년간 가르치는 동안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늘 “괜찮다”며 내색하지 않던 아이였다.
송선이 경기 평택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던 고속버스터미널.
송선은 연습실에서 나와 경기 평택시에 있는 집으로 갔다. 치킨을 시켜먹고, 쇼핑을 하고,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이후 처음으로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김제이미 역시 아이돌 데뷔 경험이 있어 희망고문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송선을 포기할 수 없었다. 송선이 가수 벤의 ‘희재’를 똑같이 따라 부르기 위해 두 달 동안 그 곡에만 매달렸던 때가 떠올랐다.
김제이미는 당시 송선에게 “입 모양을 잘 봐라. 입 모양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고 지나가는 말로 조언했는데 송선은 정말로 입 모양을 하나하나 분석해 왔다. 송선은 무대 영상을 수백 번 돌려보고 원하는 수준까지 소리를 내기 위해 호흡할 때 가슴과 배의 근육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까지 연구했다. 김제이미는 “제가 지켜본 송선은 연습을 더 해오라고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스스로 노력하고 책임감도 강했다”고 했다.
보컬 연습실에 놓인 메모가 적힌 가사지.
‘트라이비’ 멤버들이 안무를 연습하고 자체 콘텐츠를 촬영하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기획사 연습실.
김제이미는 송선을 집으로 불렀다.
“나는 아이돌로 서봤던 그 때의 무대가 지금도 그리워. 너는 한 번도 무대 경험을 해보지 못한 건데 이대로 포기하면 아쉽지 않겠어?”
더 이상의 연습생 생활은 없다고 마음먹었던 송선은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제이미의 설득에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대는 한 번 해봐야 하지 않을까….’
송선은 연습실을 나간 지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소속사 직원들은 “송선이 웃는 모습을 그제야 처음 봤다”고 했다.
‘트라이비’ 멤버들이 연습실에서 타이틀곡 ‘러버덤’ 안무를 맞춰보고 있다.
데뷔해도 3년 안에 결판 나는 세계
송선이 고3 때부터 함께해온 현 소속사 총괄 프로듀서(PD) 신사동호랭이는 데뷔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송선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정말 운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그는 2019년에도 송선이 포함된 데뷔조를 준비했다. 앨범 녹음까지 마쳤지만 팀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자금이 확보되지 않아 데뷔 직전 결국 접었다.
연습생은 당장의 데뷔가 간절하지만 연예기획사로선 데뷔 이후의 성공이 목표다.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려면 보통 최소 10억 원이 든다. 데뷔는 시작일 뿐 인기를 지속시킬 팬덤을 구축하려면 이후 3년 간 계속 투자해야 한다. 많게는 3년에 100억 원 이상 투자해야 할 수도 있다. 실력과 자본이 갖춰지지 않은 채로 데뷔했다가 실패하면 ‘패자부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아이돌 세계의 공공연한 법칙이다.
다시 연습실로 돌아온 송선은 멤버들과 데뷔곡 ‘둠둠타’를 수없이 연습했다. 아이돌 그룹은 ‘자다가 깨도 무반주에 칼군무가 나올 수 있는 수준’을 목표로 연습한다. 갓 데뷔한 아이돌은 무대 위에서 한두 번만 실수해도 ‘실력 없다’는 낙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송선은 데뷔 앨범을 녹음하고,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도 언제든 데뷔가 엎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송선은 올 2월 7인조 걸그룹 ‘트라이비’ 데뷔 쇼케이스를 며칠 앞두고서야 데뷔를 실감했다.
두 번째 싱글앨범 타이틀곡 ‘러버덤’ 무대 중 고음을 지르는 메인보컬 송선.
“이제 그냥 ‘김송선’이 아니라 트라이비의 송선이 된 거잖아요. 기획사 연습생일 때는 그냥 연습생이에요. 근데 이제 트라이비의 송선이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되니까 저도 누군가에게 그룹 이름을 달고 얘기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걸그룹 트라이비는 데뷔 석 달 만인 5월 18일 두 번째 싱글 앨범을 들고 서울 광진구 ‘yes24 라이브홀’에서 다시 쇼케이스 무대에 섰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의 유일한 현장 관객은 멤버들의 가족이었다.
‘트라이비’ 멤버들이 송선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사인 앨범.
송선의 어머니가 캄캄한 2층 관중석에 있었다. 어머니는 무대를 보면서도 한 손으로 스마트폰에서 생중계되는 쇼케이스 영상에 수 없이 많은 하트를 누르고 있었다. 이날 기자와 만난 송선의 어머니는 딸에 대해 말을 아꼈다. 힘들게 데뷔한 딸에게 자신의 말 한마디가 혹시 폐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트라이비’ 멤버들이 수록곡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트라이비’가 쇼케이스를 시청하는 팬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다.
송선은 데뷔 문턱을 넘는데 9년이 걸렸지만 숨을 돌릴 시간이 없다. 트라이비는 이제 막 싱글 2집 활동을 마친 여러 신인 걸그룹 중 하나다. 치열한 아이돌 세계에서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기자는 송선에게 “몇 년 후쯤 성공해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래도 5년 이상은 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옆에 있던 신사동호랭이 PD가 말했다.
“3년 안에 결판내야지.”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99℃: 한국산 아이돌’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original.donga.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3기
▽팀장: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기사 취재: 김배중 임보미 위은지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개발 최경선 박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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