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양역의 모습. 평양의 하늘이 정전으로 캄캄한 가운데 평양역사 김 부자 초상화에만 비상발전기를 돌려 조명을 비추고 있다. 초상화보다 더 높은 곳에 대형 시계가 설치돼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당시 북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차고 다니는 시계는 모란봉이란 상표의 기계식 태엽시계였는데, 일본 조총련에서 설비를 들여와 공장을 지었다고 했다. 소련에 간 벌목공들 덕분에 투박한 소련제 시계도 많이 들어와 팔렸다. 그렇지만 북한에서 명품시계처럼 인정받은 것은 일본 세이코 브랜드였다.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대거 들여와 팔았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지금 북한 사람들의 손목은 중국산 전자시계가 차지했다. 중국산 짝퉁 세이코 전자시계도 많이 들어갔다. 투박하고 시간도 잘 맞지 않는 모란봉 시계는 어느 순간 팔리지도 않게 됐다. 벽시계조차 중국산이 차지했다.
그러나 북한은 다르다. 손목시계나 벽시계가 없으면 시간을 알 방법이 거의 없다.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휴대전화가 많이 보급됐지만, 가난한 농촌 지역에 가면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TV는 정전 때문에 거의 나오지 않는 데다 혹 전기가 와도 저녁에만 방영된다. 컴퓨터나 노트북을 갖고 있는 집도 거의 없다.
북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국경을 폐쇄한 지 1년 반이 돼 가는 지금, 주민들의 가장 큰 불편은 뜻밖에도 시계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의 관심사는 쌀값, 옥수수값, 외화 환율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정작 대다수 북한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요즘 북-중 밀무역 종사자들에게 북한에서 가장 많이 요구받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이 거의 비슷하다. 식량도, 기름도, 설탕도 아닌 시계 배터리가 최우선 요구사항이라고 한다.
국경 폐쇄 1년 반이 되니 북한 사람들이 차고 다니는 시계의 배터리가 멈춰서기 시작한 것이다. 벽시계도 마찬가지다. 북한에는 중국의 주문을 받아 임가공으로 시계를 생산하는 공장은 있지만, 시계 배터리를 생산하는 공장은 없다. 북한의 대다수 시계는 작고 둥근 중국제 배터리를 쓰고 있는데 이것이 수입되지 않는 것이다.
시계 배터리는 과거 수입해 쌓아둔 재고도 거의 없다. 예전 북-중 무역이 활발하던 시기에 작고 가격이 비싸지도 않은 시계 배터리는 수입업자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품목이었다. 그런데 국경이 폐쇄되자 뜻밖에 시계 배터리가 금값이 되고 있다. 이미 북한에 있던 재고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다 팔려버린 상태다.
시계란 항상 옆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런데 정작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 수 없으면 약속도 잡기 어려워 사회엔 엄청난 혼란이 조성된다.
요즘 북한에선 초침이 돌아가는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게 곧 부의 상징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팔목에 시계도 없이 다니면 더욱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니, 멈춘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시간이 정지된 사회는 더 이상 현대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북한은 핵무기를 만든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다, 잠수함을 만든다며 힘을 과시하려 하지만, 정작 손톱만 한 시계 배터리 하나 때문에 한 세기가 후퇴하고 있다. 그토록 부르짖던 자립식 주체경제도 배터리 하나에 치명타를 입고 있다.
최근 변종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북한이 언제 북-중 국경을 개방할지 점점 기약이 없어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그나마 돌아가던 북한 주민들의 시계조차 하나둘 멈춰 설 것이다. 과거 ‘고난의 행군’ 시기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참상도 이겨냈던 북한 주민들이지만, 시간을 모르고 사는 사회는 그들도 여태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신세계일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