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한국산 아이돌 3분의 완벽을 위해 셀 수도 없이 샌 밤들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할 것은 없다
갓 데뷔한 아이돌이 ‘누가 누구야’ ‘다 똑같네’ 소리만 듣다 비참히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미 구별이 어려운 아이돌 그룹이 포화한 이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
요즘 K팝은 유튜브 시대에 맞게 ‘보는 음악’으로 전 세계의 팬들을 확보한다. 갓 데뷔한 아이돌 그룹에게 뮤직비디오 촬영은 이후 활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분기점이다. 아이돌 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뮤직비디오로 보여줄 수 있는 안무, 외모, 패션에 쏟는 격렬함도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제 막 데뷔한 걸그룹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의 땀내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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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한 ‘칼군무’를 반복하는 멤버들은 ‘컷’ 소리가 나면 바닥에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뮤직비디오는 어느덧 끝이 나 있다.
7인조 걸그룹 트라이비 ‘러버덤’ 뮤직비디오의 재생시간은 3분 31초. 라면 하나가 채 다 끓지 못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 영상에는….
트라이비 멤버들이 안무가(오른쪽)와 방금 춘 군무 뮤직비디오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DESERTBEAGLE, Oroshi, Hong jaehwan, Baek jongwoo, Joung yuseok, Son jueun, Sim hyunsoo, Kang heegeon, Kim gichul, Kim seoyoon, Yang jaeyong, Kim woobae, Lee kwisaek, Kim Jooseung, Seo seohee, Min sungju, Kim kwangmo, Park sumin, Kim jimin, Ahn juyoung, Yu minju, Park byungju (b.think _light), Oh gyeongho, Jeon jong won, kim gi beom, kim yeong jae, Jo dong woo, Kwon Seunghyeon, Bok sebin, Kim miji, Shin yejin, Jo seoyeon, Kim kyungrae, Jimmy jib Lee dongjin, Kim kitae, Lee seokchan, Lee munhyoung, Ma sungkeun, Hong jaehwan, Baek jongwoo, Leasti, Lee seonjin
TR Entertainment/Universal Music Ltd., 신사동호랭이, 강범창. 성장용, 이정민, 박예원, 박가희, 윤지호, 류한나, 조은비, 이유겸, 이창호, 원지훈, 권지윤, 어혜인, 박지언, 임가영, 손희정, 박현규, 박현민, 김희선, Li Xin, Liu Wanqiao, @HNS HQ, ELLY, Bart Lee ,@SUPREMEFIELD, YURI, Haeinyss, 김종훈, 박현식, 박관용, 허윤서
다미, 아름, 도규, 레온, 지영, 현준, 은비, 이수, 은희, 아영, 하이, 서인, 이유주, 신다연, 김혜린
3분 31초의 완벽을 향한 ‘불완전’의 향연
“멤버들, 이동하실게요.”
군무 장면을 촬영할 3층 강당으로 멤버 7명과 헤·메·스(헤어·메이크업·스타일리스트) 스태프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그사이 7인조 걸그룹 트라이비 멤버 소은은 “어떡해요”라며 밑창이 달랑거리는 워커를 들어 보였다.
3일 전 뮤직비디오 촬영 때 하루 신었던 워커. 반복된 군무 촬영 하루 만에 밑창이 떨어져 의상팀은 급히 본드를 발랐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완벽한 군무뿐이다. 자로 잰 듯한 칼군무는 한국 아이돌의 기본 덕목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합숙 연습’ 문화가 없는 해외에서는 여전히 경이로운 장면이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샤이니가 있었어요. 춤을 너무 잘 추고 있었어요. 화면으로 볼 때도 잘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볼 때의 움직임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미쳤다’ 이러면서 보고 있었죠. 멤버들이 인사하러 왔길래 ‘너네 춤 너무 잘 춘다’고 하니까 그건 평소 하던 것의 40~50%래요. 리허설하면서 맞춰보는 중이라는 거예요. ‘그게 50%라고?’라고 하니까 좀 이따 제대로 하는 거 보래요. 그리고 다음에 찍는데 거의 로봇처럼 움직이더라고요.”(출처: React to the K)
하지만 완벽에 이르는 과정은 온갖 ‘불완전’의 향연이다. 안무는 뮤직비디오 촬영 직전에야 수정에 수정을 거쳐 최종 확정된다. 트라이비의 안무를 담당한 손유리 안무가는 “특히 하이라이트인 후렴 부분은 첫 안무 시안대로 확정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음악의 인상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촬영까지 남은 일주일 안팎의 시간 동안 멤버들은 밤을 새워가며 안무와 각자의 동선을 몸에 익힌다. ‘완벽’에 가깝게 끌어올리는 건 이들의 노력이다.
뮤직비디오 촬영 날. 군무 촬영을 앞두고 연습을 하고 있는 멤버들.
흐트러짐 없는 ‘칼군무’ 위한 무.한.반.복
4월 21일 본격적으로 이어진 군무 촬영. 중간에 ‘컷’ 소리가 나면 스태프는 멤버들에게로 달려온다. 조금 전까지 담요를 들고 오던 이들이 이젠 선풍기를 들고 왔다. 해가 지자 서늘해진 기온에 스태프는 패딩 점퍼를 챙겨 입었지만 반복된 촬영에 멤버들은 반팔과 핫팬츠 차림에도 땀이 식을 새가 없었다. 군무 촬영은 멀리서 보면 ‘무한반복’의 현장이다. ‘컷’ 소리와 동시에 헤·메·스 스태프가 종종걸음으로 멤버들에게 뛰어간다.
군무 촬영 사이사이,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 1초 전까지 헤메스 스태프은 ‘완벽한 아이돌 비주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스탠바이 신호가 떨어지면 카메라 앵글 속 수십 명의 스태프가 썰물 빠지듯 앵글 밖으로 뛰어나간다. 얼마나 격한 춤을 췄든 상관없다. 멤버들은 매번 촬영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늘 갓 메이크업 숍에서 나온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군무 촬영이 몇 시간씩 이어지는 동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춤추는 멤버들 사이로 지미집이 수없이 앞뒤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 비슷해 보이는 일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가 모여 결정적인 차이로 이어진다.
게다가 예산을 넘기지 않으려면 섭외한 장소에서 한정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그림을 뽑아내야 한다. 멤버들은 체력이 닿을 때까지 군무를 최대한 반복한다.
장소를 대형 화면 앞으로 옮긴 마지막 군무 촬영이 이날 오후 9시 30분쯤 시작됐다. 촬영장 구석에는 아직 뜯지 못한 촬영팀 스태프의 도시락과 커피 캔이 널브러져 있었다.
촬영이 재개되자 현빈이 바닥에서 쉬고 있던 송선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왼쪽) 격한 군무를 추다보면 ‘피’를 보는 일도 잦다.
이날 오후 4시 30분부터 군무를 반복해온 이들을 지켜본 홍재환 감독의 마음도 편치 않다.
“이미 수도 없이 연습하느라 성치 않은 몸을 끌고 춤을 추고 또 추고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죠. 멤버들이 혹시나 자기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는 거 아닌가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본인은 이미 몸의 한계치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런 와중에도 좀 더 찍자고 할 수밖에 없는 저희가 미안하죠.”
소은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홍 조감독은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군무, 이제 진짜 마지막이에요!”
오후 11시 48분, 오케이 사인이 났다. 촬영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멤버들의 환호성…. 그 틈에서 멤버 현빈이 아무 말 없이 소은을 끌어안았다.
형태소 단위의 발음까지도, 모든 것은 계산된다
“사실 노래 한 마디를 부르더라도 수백 가지 길이 있어요. 저만의 발음을 살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ㅂ 발음이랑 ㄱ 발음, ㅍㅊㅌㅋ 같은 치찰음요. ㅂ을 완전히 발음을 안 하고 입술에 약간 공간을 넣어 이 부암~으로. ㄱ 발음도 ㄱ과 ㅋ의 중간 발음으로. 보통 치찰음 계속 들으면 피곤해질 수 있어서 많이 빼는데 전 많이 살려서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해요. ㄱ을 ㅋ같이 하면 약간 예쁘고 트이게 들리거든요.”(아이유·KBS 스케치북)
연습실에서 보컬 연습 중인 켈리
“그 어느 때뽀다 떠 짜유로워 난”
진하가 부르는 이 가사 구절은 거의 이런 소리가 되어 갔다. 진하는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며 강조해야 할 단어를 부를 때면 손가락을 허공에 톡톡 찍었다.
연습실 안 현빈. 가사에 필기를 해가며 노래를 연습하는 모습은 독서실 속 학생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로만 녹음한 메인 사운드만 들으면 힘이 조금 떨어지지만 더블링한 ‘짜’를 덧입히면 보다 강력하고 단호한 느낌을 준다. 신사동호랭이는 “다소 과할 수 있는 ‘짜유’라는 발음을 이런 식으로 더블링을 통해 섞어 표현하면 후렴으로 이어지는 진하 파트에 힘이 실린다”고 말했다.
컴백 전 자켓 촬영 중인 송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억울할 것은 없다
5월 18일 싱글 2집 앨범 쇼케이스 당일 새벽. 트라이비 멤버 지아와 현빈은 나흘 만에 다시 미용실을 찾았다. 둘은 청량함을 강조한 이번 앨범 콘셉트에 맞게 각기 핑크색과 보라색, 금발과 보라색으로 염색을 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 그 전에 입혔던 머리색이 빠지는 걸 조금이라도 늦춰보려 30초 타이머를 맞추고 찬물에 머리를 감는 고행도 이어왔다. 이제는 팬들에게 신곡을 선보이는 행사를 앞두고 이 색감을 다시 살리는 ‘컬러 리필’ 작업을 하는 것이다. 헤어숍 ‘위위아틀리에’ 다미 실장은 “시간이 없는 아이돌 친구들 스케줄에 맞추려면 쇼케이스 날처럼 새벽에 염색을 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했다.
컴백 쇼케이스를 준비하며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현빈.
‘스케줄 아니면 연습실’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일과는 오직 이 두 개의 세계를 오가는 것으로 채워진다. 마치 두 개의 숫자만으로 수를 나타내는 이진법처럼, 그들은 스케줄 있을 때가 아니면 연습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앨범 공개 이후 공식 활동 기간이냐, 아니냐에 따라 전체 일과에서 스케줄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줄어들었다 할 뿐이다.
연습실에서 미용실로 이동하고 있는 트라이비 멤버들.
이날 오후 6시 드디어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트라이비의 컴백 쇼케이스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이 무대에 서기까지 7명의 멤버들은 지독하고 고독한 ‘이진법의 시간’을 지나왔지만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지 못하면 몇 년간의 지난했던 노력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것이다.
억울할 것은 없다.
무대에 선 사람들은 아이돌의 숙명이 무엇인지
모두 잘 알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시대가 저절로 온 것은 아니다. K팝 아이돌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동력이 무엇인지 찾다 보면 낯익은 표현과 만나게 된다.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한국산 아이돌’은 10대의 젊음을 태워 만들어진다. 열망이 뜨거워질수록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냉혹한 이 세계로 어린 지망생들은 계속해 몸을 던진다. 살아남은 소수가 다수의 좌절 위로 한 걸음씩을 내디디며 K팝은 여기까지 왔다. 아이돌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그래서 뜨겁지만 동시에 차갑다. 1996년 H.O.T. 데뷔 이후 25년간 해외 시장을 두드려 BTS 같은 스타를 배출했다는 자부심과 노동집약적 압축 성장을 추구해 온 한국적 상품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어떻게 바라보든 K팝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끓는점 100도를 향해 마지막 1도를 끌어올리려 분투하는 ‘99도 한국산 아이돌’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99℃: 한국산 아이돌’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original.donga.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기사 취재: 김배중 임보미 위은지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개발 최경선 박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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