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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영화, 안 무섭게 보는 법[이승재의 무비홀릭]

입력 | 2021-07-23 03:00:00

더러운 것과 무서운 것은 같을까, 다를까? 태국의 반쫑 삐산타나꾼 감독이 연출한 공포영화 ‘랑종’. ㈜쇼박스 제공


[1] 학창 시절이던 1985년, 서울 스카라극장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나이트메어’라는 공포영화를 보러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저는 공포에 떨었어요. 신문 광고에 난 “옆 사람을 껴안아라! 그것만이 살길이다”라는 이 영화의 홍보 문구 때문이었죠. 21세기 감각으론 젠더 감성조차 부족한 싸구려 표현이지만, 당시로선 데이트 중인 청춘 남녀를 극장으로 유혹하기에 충분히 자극적이었지요. 영화를 보다 저는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얼굴도 흉측한 살인마 프레디가 중절모를 쓴 채 변태처럼 애들이 입는 줄무늬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게 아니겠어요? 하지만 제 옆에 앉은 20대 청년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해요. 곁에 앉은 여자친구가 “아잉” 하며 무서워하자 남자답게 어깨를 감싸주었지요. 그러나 슬쩍 훔쳐본 그 남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어요. 본능적으로 무서워서 몸을 움찔하면서도, 입술을 앙 다물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였어요.

사건은 영화가 끝난 뒤 일어났어요. 상영관을 나오면서 대여섯 개짜리 짧은 계단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이 남자가 발을 헛디뎌 살짝 미끄러진 거예요. 순간 남자는 그동안 참았던 공포가 활화산처럼 분출한 건지, 자신도 모르게 “으아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러대서 주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어요. 얼마나 안 무서운 척하느라 힘들었으면 이런 얼굴 팔리는 일이 벌어지겠어요. 맞아요. 진짜 무서운 영화는 관객이 극장을 나오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닐까 말이에요.

[2] 무섭다고 소문난 ‘랑종’이란 태국 공포영화를 얼마 전 보았어요. 반려견을 삶아 먹는 것 같은 더러운 장면은 몇 개 있었지만, 모골이 송연해지는 근원적 공포는 별로 느끼질 못했어요. ‘엑소시스트’ ‘블레어 위치’ ‘파라노말 액티비티’ ‘링’ ‘캐리’ 같은 동서양의 기념비적인 공포영화 속 핵심 아이디어들이 여기저기 소환된 듯 기시감이 넘칠 뿐이었지요. 막판에 좀비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관객이) 보고 느끼게 만드는 데 실패한 이 영화가 당도하게 되는 서글픈 종착역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어요.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장내 조명을 밝힌 채 랑종을 상영하면서 “불을 켜고 보면 좀 덜 무서울 수 있어요”라며 열었던 ‘겁쟁이들을 위한 상영회’가 영화 자체보다 신선하고 창의적이란 생각도 들더군요.

[3] 하지만 이건 매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열등감 많고 성격 꼬인 저의 관점일 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랑종을 무섭다고 해요. 그래서 무서운 영화를 보기 싫어하는 남성들이 여자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랑종을 보게 될 경우를 대비해 조언해 드려요. 무서운 영화, 안 무섭게 보는 법을 말해 드릴게요.

우선 아예 딴생각을 하는 방법이 있어요. 무서운 장면이 나올라치면 ‘빛나는 순간’이란 영화에서 고두심과 지현우가 제주도 동굴에서 나눈 키스를 떠올리는 것도 좋고요. 추자현의 남편 우효광이 무릎 위에 앉혔다는 젊은 중국 여성은 누구일까를 추정해 보아도 좋아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소박하게 사용했다는 업무추진비 카드 사용 내역을 암기해도 무방하고요.

더 심화된 2단계로는 영화에 도리어 몰입하는 방법이 있어요. 몰입하면 무서운데 무슨 얼어 죽을 몰입이냐고요? 몰입의 대상을 바꾸면 되어요. 영화 속 소소한 소품에 천착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세요. 눈알이 하얗게 뒤집어진 태국 할머니는 어떤 서클렌즈를 낀 걸까? 악령에 빙의된 여주인공이 입은 스키니 진의 브랜드는 게스일까, 아메리칸 이글일까, 리바이스일까? 아니면 뱅뱅? 좀비가 되어 기어 다니는 태국인 엑스트라들은 최저임금을 받았을까? 받았다면 우리 돈으로 시간당 얼마? 태국은 이들이 받는 보수로 소득주도성장에 성공할까?

마지막으론 고수(高手)의 방법을 소개해 드릴게요. 영화를 제작자 관점에서 능동적으로 살펴보는 거예요. 만약 랑종을 한국 영화로 만든다면? 귀신 씐 여주인공에는 누굴 캐스팅하면 좋을까? ‘차이나타운’의 김고은? ‘검은 사제들’의 박소담? 아니면 ‘마녀’의 김다미나 ‘죄 많은 소녀’의 전여빈처럼 요즘 뜨는 배우들?

이것도 통하지 않으면 최후론 외국어 대사에 집중하는 방법이 있어요. “엘아이똥위원” “미파이다 카무네래니앙” “꾸무숫뚜나 꾸무숫따이” 같은 낯선 태국어의 미학에 죽자고 귀 기울이면서 시각적 몰입으로부터 떨쳐 일어나는 방법이지요. 아니,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내 돈 내고 공포의 고통을 자청할 필요가 있느냐고요? 그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봉산 암벽을 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말이에요. 두려움도 쾌감입니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