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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더위 먹으면 어쩌시려고요”[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21-07-23 03:00:00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연구실 한쪽 구석에서 오래된 선풍기가 한 대 돌아가고 있다. 창밖에서는 매미 소리가 들린다. 이 여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좋다. 덜커덕거리며 레일 위를 달리는 완행열차에 앉아 창밖 풍경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하다. 웬만해서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 여름을 보낸다.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면 뼈마디가 시려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에어컨 바람 아래서 일을 하면 집중이 잘 안된다. 그래도 여름 더위는 더위인지라, 못 참을 정도가 되면 에어컨이 가동되는 맞은편 실험실에 가서 살짝 열을 식히고 다시 돌아온다.

나는 여름형 인간이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일을 여름에 해치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만 좀 쉴까’ 하는 마음으로 여름에 해놓은 일들을 정리하고 수정해 논문으로 발표한다. 여름에 땀 흘리며 미친 듯이 일할 때면 효율이 최고가 되고 성취욕도 역시 최고가 된다. 가끔 이런 내 모습에 학생들이 “교수님, 더위 먹으면 어쩌시려고요”라며 걱정하곤 한다.

에어컨의 역사는 18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어컨 원리를 밝힌 과학자는 19세기 천재 물리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다. 패러데이는 최초로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밝힌 물리학자이기도 하다. 기체를 압축해 액화시킨 물질이 다시 기화될 때 기화열이 발생하는데 이 기화열을 이용하면 냉각장치를 만들 수 있다. 1842년 존 고리는 이 원리를 이용해 얼음을 만들었고, 1902년 미국의 윌리스 캐리어는 최초의 에어컨을 만들었다.

기화열이란 이런 것이다. 더운 여름 마당에 물을 뿌리면 물이 증발하면서 수증기가 될 때 열을 흡수한다. 이 열이 기화열이다. 더운 날 몸에 물을 바르면 시원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물이 증발할 때 피부의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물보다 증발이 빠른 냉각제를 사용하면 더 효율적으로 온도를 낮출 수 있다. 이 냉각 원리는 현대의 모든 냉각장치에 사용된다.

요즘 밤이 되어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열섬과 열돔 현상 때문이다. 열섬은 말 그대로 도시의 기온이 섬처럼 주변 지역 기온보다 더 높은 현상을 말하고, 열돔은 대류권 고온의 대기압이 흐르지 못한 채 정체돼 마치 체육관 돔처럼 뜨거운 공기를 가둬놓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온난화로 해류의 흐름이 불안정해지더니 하늘의 바람 흐름까지 불안해진 것이다. 이는 냉각 원리가 이제 지구에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일까.

박사과정 시절, 한여름에 저온실험을 할 때 연구실은 찜통 그 자체였다. 섭씨 영하 270도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냉각 펌프가 돌아갔고, 반대편으로 그 열기가 내뿜어져 나왔다. 당시 실험실엔 에어컨이 없어서 저온장치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선풍기를 틀어놓아야 했다. 비싼 기계장치가 우선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온도가 떨어지는 밤이 오면 약속이나 한 듯 기온이 영하 270도에 도달해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다시 해가 뜨면 서서히 온도가 올라갔지만. 그래도 내 기억엔 8월 15일이 지나면 밤에 창문을 열었을 때 시원한 바람이 창밖에서 불어왔던 것 같다. 올해도 그때까지 지구가 이 더위에 무사히 버텨주기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