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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880년대에 찾아온 개혁의 기회를 날리다”[박훈 한일 역사의 갈림길]

입력 | 2021-07-23 03:00:00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시절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동아일보DB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880년경부터 1894년 청일전쟁 발발까지 약 15년간은 조선에 기회의 시기였다.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아직 침략적이지 않았다. 아니, 조선을 침략할 만한 국력이 없었다.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고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게 능력의 한계치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의사와 능력을 갖춘 것은 1890년대 들어서다. 청나라는 일본을 견제하고자 조선에 강화도조약을 권장했으며 1882년 미국 등 서양 국가들과의 조약 체결도 적극 주선했다.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던 러시아도 조선에 구애하여 고종이 조-러 밀약을 추진하는 등 세력균형책을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조선의 메이지유신’ 꿈꾼 개화파


이렇게 열린 공간 속에서 조선의 정치세력들도 활발히 움직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다. 이들은 모두 명문가 출신 초엘리트 청년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불과 10여 년 전 벌어진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이 뻔질나게 일본을 찾은 것도 이래서였다. 당시 서른을 갓 넘긴 고종도 구닥다리 노(老)대신들보다는 같은 세대인 이들에게 솔깃했다. 1882년 임오군란 수습사절단으로 일본에 간 이들은 일본 당국뿐 아니라 도쿄 주재 서양 외교관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옥균과 뜻을 같이했던 민씨 세력의 총아 민영익은 영국 공사 파크스를 만나 “청과 조선의 조공관계는 일정한 의례에 한정된 것으로 청은 조선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최근 청조의 행위는 전례에 반하는 것이다”라며 “조선인은 청조의 간섭을 참을 수 없다”고 분개했다. 러시아 공사를 만난 박영효는 “청조의 야심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고 자주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분투할 것이라고 결기를 보였다. 김옥균은 더 광폭 행보를 했다. 일본뿐 아니라 서양 국가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김옥균 일파는 고종의 호의와 일본의 지원에 고무됐다. 때마침 청불전쟁으로 서울 주둔 청군 일부가 빠져나가자 급하게 정변을 일으켰다(1884년 갑신정변). 졸속 쿠데타의 피비린내 나는 결말은 다 아는 대로다. 약관의 위안스카이는 청군을 이끌고 궁궐을 포위하여 정변세력과 일본 병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확보했다. 일본 공사와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도망갔다. 이 정변 소식에 일본열도는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공사관은 불탔고 다수의 일본인이 죽임을 당했으며 외교관인 공사가 생사의 경계를 헤매다가 도망쳐 왔던 것이다.


맹목적 對日 적개심의 폐해



우리의 역사 서술에서는 항상 일본을 악마화한다. 결국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의 행위를 소급 적용하는 사고습관이다. 한국 병합을 한국인이라면 누군들 분노하지 않으랴. 그러나 모든 시기와 사건에서 일본은 항상 침략적이었다고 무작정 전제하는 것은 역사를 규탄의 재료로만 삼는 자세다. 이런 역사교육은 맹목적인 적개심만을 갖게 해 우리의 현명한 대일 태도를 방해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규탄만이 아니라 지혜다. 게다가 일방적인 일본의 악마화는 다른 세력들, 예를 들어 청이나 러시아 세력에 대한 비판을 무디게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수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야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 자신, 특히 당시의 위정자들을 민족주의 혹은 반일이라는 이름으로 감싼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 역사상 가장 무능했을 당시의 위정자들을 치켜세우는 최근의 일부 논의들은 그 적나라한 폐해다.

그거야 어쨌든, 때마침 흥기하고 있던 일본 신문 산업은 갑신정변으로 대목을 만났다. 저마다 자극적인 삽화와 기사로 도배질을 했다. 이런 보도는 일본 구석구석까지 침투했다. 청군과 이에 동조한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고 저마다 ‘응징’을 외쳤다. 이 때문에 일본 내셔널리즘이 하층민에게까지 침투한 계기를 갑신정변으로 보는 학설이 있을 정도다.

1882년 임오군란에 이어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다수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자 일본에서는 청군과 이에 동조한 조선인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사진은 갑신정변 주요 인물들이 1884년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중앙이 박영효, 뒷줄 왼쪽에서 4번째가 유길준이다. 동아일보DB

그러나 임오군란에 이어 연달아 자국민이 살해당한 이 사태 앞에서도 일본 정부 리더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1873년 정한론 분쟁 때와 같았다. ‘아직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 그 대신 내정을 개혁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82년 생애 세 번째 유럽여행을 떠나 최고의 헌법학자들에게서 헌법 강의를 들었다. 돌아와서는 내각 제도를 창설하여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그러고는 헌법을 제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889년 제정된 메이지헌법은 한마디로 이토의 작품이다. 그는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다시 들끓기 시작한 정한론을 억누르고 경제건설에 매진했다. 1880년대 후반 메이지정부의 강력한 리더십하에서 경제성장이 일어났다. 이를 ‘공업발흥의 시대’라고 한다. 정부는 인프라를 깔고 자본 조달을 위해 금융제도 정비에 진력했으며, 철도업과 면직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국력 키우고 한반도 침탈 노린 日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 관원들의 탈출도. 동아일보DB

‘부국’의 달성은 ‘강병’으로 이어졌다. 1870년대에 정부 예산의 14∼19%에 그쳤던 군사비는 1880년대에 25%를 돌파했다(현재 일본은 6∼7%). 이런 군비 확장에 제동을 거는 세력도 물론 있었다. ‘부국’이 ‘부민(富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이유 있는 항변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전성기에 국민복지와 평화이슈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지 못했다. 1890년 제국의회 개원 때 당시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한다. “지금 열강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이익선을 방어해야 한다. 주권선 수호에 그치지 않고 이익선을 지켜 국가의 독립을 완전하게 하려면 헛된 말로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국력이 허락하는 대로 실력을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육해군에 거대한 예산을 할당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필요성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익선은 한반도였다. 결국 ‘부민평화’ 노선이 아니라 ‘부국강병’ 노선이 이겼다. 이제 일본의 군사력은 자국뿐 아니라 한반도를 커버할 수 있어야 했다. 1877년 서남전쟁 때 4만 명에 불과했던 일본의 상비병은 1893년경 15만 명에 달해 있었다. 만약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 같은 사태가 조선에서 또다시 발생한다면 일본은 얼마든지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터졌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