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아트로드]정약용 유배지 전남 강진

월출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전남 강진의 월남사지. 텅 빈 절터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삼층석탑과 비석 하나만이 남아 있지만, 빈 공간을 꽉 채운 월출산의 풍광에 넋을 잃게 되는 곳이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흑산에 유배 중인 손암 정약전(설경구)은 동생 다산 정약용(류승룡)에게 자신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원고를 보낸다. 손암의 제자가 찾아간 곳이 정약용이 유배 중이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정약용은 산 위에서 강진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파도 너머 흑산에 살고 있는 형의 안부를 걱정했다. 이곳에는 ‘천일각(天一閣)’이 세워졌다.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로, 하늘끝 벼랑에 세워진 정자라는 뜻이다. 해남이 ‘땅끝(土末)’이라면, 강진은 ‘하늘끝’인 셈이다. 임금으로부터 멀고 먼 남쪽 땅에 유배된 이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 고통의 유배, 반전의 명작

강진 청자박물관의 도예체험.
동백나무 열매가 열리기 시작한 백련사 숲길을 통해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을 걸었다. 다산의 지음(知音)이었던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가던 800여 m의 산길은 홀로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호젓한 오솔길이다. 다산초당의 뒷산은 야생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다. 정약용의 호는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지방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목민심서), 백성이 억울함이 없도록 공정한 법 집행에 대한 연구(흠흠신서), 국가의 전반적 체제와 경영 혁신(경세유표)에 고민했던 다산이 걷던 길이라 요즘에도 출마를 앞둔 정치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길로도 유명하다.
정인보는 “다산 선생에 대한 고구(考究)는 곧 조선사 연구요, 조선 근세 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 내지 전조선 성쇠존멸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썼다.
○ 100년간 지켜온 스승과 제자의 약속
다산의 길고 긴 유배 생활에 마음을 달래는 벗이 되고, 약이 되어준 것은 바로 차였다. 다산초당 앞마당에는 차 끓이는 부뚜막으로 쓰였던 돌 ‘다조(茶조)’가 놓여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藥泉)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중 11년을 머무른 다산초당.
다산은 봄이 되면 초당 뒷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야생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었다. 1818년 다산이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됐다. 다산에게는 두 가지 큰 걱정이 있었다. 앞으로도 제자들이 꾸준히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이 첫째요, 차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이 둘째였다. 떠나는 스승을 위해 18명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했다. 제자들이 매년 봄에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스승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이었다.
다산의 사후에도 제자와 그 후손들은 다산 집안에 매년 차와 글을 보냈다. 다산가(家)에 보내진 차의 이름은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 ‘금릉’은 강진의 옛 지명이고, ‘월산’은 월출산이라는 뜻이다. 이시헌의 집안 후손인 이한영(1868∼1956)은 일제강점기 시절까지 다산 집안에 이 차를 보냈다. 그런데 일제가 강진, 보성의 차를 대량으로 수탈해 가서 일본 차로 둔갑시키자,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월산차(月山茶)’라는 한국 최초의 상업화된 차 브랜드를 만들었다. 백운옥판차는 백운동, 옥판봉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차의 포장지에는 독립된 조국의 봄을 상징하는 매화꽃을 한반도 모양으로 그려 넣었다.
다산 제자의 후손인 이현정 원장이 다산이 즐겨 마시던 ‘백옥판차’를 제조하고 있다.
“지금 드시고 계신 차는 월출산 야생 찻잎으로 만든 차로, 다산 선생이 평생 그리워했던 차입니다. 백운옥판차에는 두 가지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100년 이상 지켜온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아름다운 약속이자 일제강점기에 우리 전통차의 자존심과 맥을 이어온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 사의재(四宜齋)의 ‘아욱국’
다산이 유배지에서 먹고 힘을 냈다는 동문주막의 ‘아욱국’.
○ 강진생태공원
짱뚱어가 뛰어노는 강진 갯벌.
글·사진 강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