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석 전 질병관리본부장 편
감염병 발생은 천재(天災)지만 대응은 사람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대응의 가장 중추적 역할을 하는 곳이 지난해 질병관리청으로 승격된 질병관리본부지요. 하지만 그가 들려준 질병관리본부의 실상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힘을 가지고 모든 방역 대책을 진두지휘해야할 질병관리본부장에게 사실상 실권이 거의 없다는 것이죠. 그는 기관장인데도 취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6급 이하의 인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규정에는 6급 이하 인사는 소속 기관의 장이 한다고 돼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보건복지부가 안 놔줬다고 하더군요. 그나마도 문제점을 계속 지적하고 언론에서도 떠드니까 줬다고 합니다. 5급 이상은 여전히 사전에 의논도 하지 않고 그냥 내리 꽂았고요. 5급 사무관 인사도 할 수 없는 기관장이 대규모 감염병 상황에서 무슨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질병관리청으로 바뀐 뒤에는 얼마나 달라질지 모르지만 과거 질병관리본부를 복지부 고위직 인사적체를 해소하는 곳으로 이용했던 행태도 문제입니다. 인터뷰를 했던 지난해 3월은 앞서도 말했듯이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시기입니다. 감염병 대응에 가장 중요한 곳이 긴급상황센터와 감염병관리센터인데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이 두 곳의 센터장은 복지부에서 온 지 1년도 안된 행정고시 출신들이었습니다. 문과생들이라는 것이죠. 당시 국민들은 매일 코로나19 브리핑에 나서는 정은경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얗게 센 그의 머리가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물론 그의 책임감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의료계에서는 의학적 지식이 없는 문과 출신 고위관료들이 기자들의 여러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 본부장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냐는 시각도 많았습니다.
질병관리본부 사람들이 안타까운 것은 실권도, 인력도 없는데 방역 실패의 책임은 져왔다는 점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본인이 2015년 메르스 사태로 중징계를 받았지요. 당시 감사원은 질본이 초기에 병원 이름을 비공개로 해 감염을 확산시켰다는 이유로 양병국 본부장, 정 청장(당시 긴급상황센터장) 등 질본 간부들의 중징계를 건의했습니다. 그때 질본 내 많은 의사 출신 간부들이 정부의 행태에 실망해 떠났다고 하는군요. 책임을 지우려면 그에 합당한 권한을 주던지, 권한을 안 주면 책임을 지우지 말던지 그러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질병관리청으로 승격된 후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걸 반증하는 일이 최근 벌어졌습니다. 3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서울 도심 대규모 집회를 앞두고 2일 김부겸 국무총리가 정은경 청장을 대동하고 민주노총을 찾았지요. 집회 자제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의료계에서는 이 엄중한 시기에 방역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질병관리청장을 대동하고 가는 게 과연 적절한 것이냐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집회 금지를 통고하고 위반하면 그에 따라 대응하면 될 일을 밤잠도 못자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정 청장을 데리고 가 읍소하는 게 과연 맞느냐는 것이죠. 일종의 코스프레를 한 것인데 힘들게 일하는 정 청장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국가의 위신을 떨어트린 행동이라는 지적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더욱이 민주노총은 정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집회를 강행했지요. 방역의 최고 사령탑인 질병관리청장을 데리고 가 읍소를 했는데도 소용이 없으니 도대체 누가 앞으로 정부의 방역 지침을 따를지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