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박 ‘세기의 전시’ 비하인드 스토리 겸재 그림 그릴 때 ‘장마상황’ 고려, 비 오는 날과 비 갠 직후 풍경 담아 ‘인왕제색도’ 가장 효과적으로 소개… 삼성 문화기획전, 국민자긍심 고취 李회장 업적 기리며 전시명 반영… 다양한 유물 전시 위해 리모델링도
전시장 입구의 초대형 TV를 통해 재생되고 있는 ‘인왕산을 거닐다’ 영상.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한옥 처마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마당은 빗물로 출렁인다. 기세 좋던 빗줄기가 점차 잦아들고, 인왕산은 흰 구름을 드리운 채 자태를 드러낸다. 치마바위, 코끼리바위 등 인왕산 구석구석은 물을 머금었다. 19일부터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국박) 서화실 입구의 초대형 TV에 흐르는 영상이다. 관람객들이 전시실에 들어서면 ‘인왕산을 거닐다’라는 제목의 이 영상부터 보게 된다. TV 앞 나무 의자에 앉아 해금 연주곡을 배경으로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를 그릴 무렵 겸재 정선(1676∼1759)과 같은 시선으로 조선시대 인왕산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국박 관계자들은 5분 10초 분량의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올 5월 말∼6월 초 나흘에 걸쳐 인왕산을 촬영했다.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린 ‘1751년 윤 5월 하순(음력)’에는 5일 넘게 장맛비가 이어졌다. 그는 비가 그친 직후 물기를 머금은 인왕산 풍경에 자신이 평생 지켜본 산의 느낌을 가미해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이에 따라 국박은 비 오는 날과 비가 갠 직후의 인왕산을 각각 카메라에 담았다. 이재호 국박 학예연구사는 “이건희 컬렉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람객에게 소개하는 방안을 고심한 결과물”이라며 “그림 속 인왕산이 우리 곁의 뒷산이라는 사실을 보여줘 작품에 빠져들도록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상이 재생되는 TV는 삼성이 대여해 줬다. 당초 국박은 75인치 TV를 구입하려 했지만 영상 제작 소식을 들은 삼성이 흔쾌히 이보다 큰 TV를 무상으로 빌려줬다고 한다.
23일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서 관람객들이 인왕제색도 등을 감상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국박이 통상 전시기획 단계에서 타깃 연령대와 성별을 정하는 작업을 이번에는 진행하지 않은 것도 이례적이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전시인 만큼 이 같은 절차가 필요 없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서 예매는 하늘의 별따기다. 국박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예약만 가능한데 25일 현재 예약 가능한 26일∼다음 달 24일 한 달 치가 모두 매진됐다. 26일 0시가 되면 다음 달 25일 전시 예매가 가능하지만 보통 5초도 되지 않아 예약이 끝난다. 최근 전시실 입구에선 예매를 못한 채 멀리서 찾아와 “전시를 보게 해 달라”며 실랑이를 벌이는 관람객들이 자주 목격된다. 국박 관계자는 “방역지침에 따라야 해 현장에서 사정해도 어떻게 해드릴 방법이 없다. 간혹 예약 취소가 나오는데 이를 노려 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