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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강국을 뒤흔드는 백신 괴담[특파원칼럼/유재동]

입력 | 2021-07-27 03:00:00

범람하는 허위정보에 美선 접종 기피 현상
백신 기술만큼 사회적 신뢰 회복이 중요



유재동 뉴욕 특파원


얼마 전 동네 백신 접종센터를 지나가는데 직원들이 입구에 걸터앉아 할 일 없이 잡담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창고에는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이 가득 쌓여 있었지만, 맞으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거의 개점휴업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마침 한국에선 백신 예약을 위해 온라인에서 수십만 명이 줄 서고, 그마저도 잦은 시스템 오류로 먹통이 된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극적으로 대비가 되는 두 나라의 상황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백신 강국’ 미국에선 예방효과가 뛰어나고 부작용도 덜한 ‘고급 백신’들을 예약 없이, 무료로, 아무나 맞을 수 있다. 안전성이나 효능 논란이 있는 얀센·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등은 이곳 사람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미국마저 확보에 애를 먹는 게 있으니, 바로 백신을 맞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다. 접종을 마친 인구가 아직 절반이 채 안 되는데, 하루 접종 인구는 수십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대로는 집단 면역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얼마 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백신을 놔주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한가한 동네 접종센터 직원들도 이제 곧 주사기를 들고 다니며 바쁘게 초인종을 눌러댈지도 모르겠다.

백신 한 방울이 아쉬운 우리로서는 이런 미국의 상황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난 7개월여 동안 미국은 2억 명에 이르는 국민이 접종에 나서면서 사실상의 거대한 자연 임상시험을 거쳤다. 결과를 보면 백신이 100% 완전하다고 볼 순 없어도 감염은 물론, 중증 질환이나 사망의 위험을 크게 낮춰준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4명 중 1명 정도는 백신의 효력에 의문을 가지며 여전히 접종을 마다하고 있다. 이런 거부 심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놀랍게도 상당 부분은 인터넷에 떠도는 허위 정보에 기인한다는 게 비영리기관인 디지털증오대응센터(CCDH)의 분석이다.

백악관이 최근 언론에 소개한 이 조사에 따르면 연구진은 올 2, 3월 온라인에서 백신 등에 관한 허위정보 게시물 81만여 건의 기원을 일일이 추적했다. 그 결과 이 중 절반이 넘는 65%를 단 12명의 슈퍼 전파자가 사실상 퍼뜨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허위정보 12인방(Disinformation Dozen)’으로 불리는 이들은 “백신이 유전자정보를 바꾼다”, “백신이 자폐를 유발한다”, “코로나는 5세대(5G) 통신으로 퍼진다”와 같은 글을 인터넷에 올렸고, 이는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돼 반(反)백신주의자들의 페이스북 계정과 블로그에 게재됐다. 이런 가짜 뉴스는 한번 ‘제조’가 되면 유통, 소비까지 모든 과정이 불과 수 시간 만에 이뤄졌다고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회에 이런 그럴듯한 음모론은 백신에 대한 편견을 더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

최근 백신 접종 여부를 둘러싼 미국의 혼란상은 작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마스크 사태와 판박이다. 국민들의 심리적 거부감이 정치권의 선동, 가짜 뉴스 등과 결합하면서 중대한 방역 위기를 초래했다. ‘백신 강국’ 미국이 오히려 관련 괴담으로 흔들린다는 사실은, 백신 개발 기술 못지않게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와 성숙도 역시 팬데믹과의 전투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미국, 유럽의 그 흔한 마스크 반대 시위 없이 오랜 시간을 조용히 인내해 온 우리 국민들이야말로 방역의 소중한 자산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