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더럽고 끈적한 심리를 구석구석 파고드는 소설가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섬세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소설가로 각인되어 있다. ‘백치’(김근식 옮김·열린책들·2009년)를 읽은 이후부터다. 작가가 “이 소설의 주요한 의도는 아름다운 사람을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이 아름다운 사람이란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이다. 러시아의 바보 성자(聖子)인 ‘유로디비’의 전형. 모두가 업신여기지만 모두에게 사랑받는 백치. 간질 때문에 스위스에서 요양했던 그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언뜻 소설은 미쉬낀이 부유한 귀족의 막내딸 아글라야와 광기에 사로잡힌 미인 나스따시야 사이에서 갈등하는 구도로 보인다. 나스따시야는 모든 인물을 쥐고 흔든다. 보는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미모, 경멸과 분노를 숨기지 않는 눈빛, 복수를 위해서라면 자학도 불사하는 정열. 남자들은 그녀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돈을 내밀고 그녀의 위악적인 태도 앞에서 벌벌 떤다. 그 파괴력의 원천은 이 문장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나스따시야는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그녀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가. 가슴에 증오가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16세부터 늙고 유력한 재산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해 온 나스따시야는 수치심과 모욕감에 휩싸여 한순간 변해 버린다. 사람들은 그녀를 숭배하면서도 비난하고, 그녀가 미쳤는지 아닌지 수군댄다. 그러나 미쉬낀만은 나스따시야의 눈동자에서 오염되고 타락한 광기가 아니라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을 본다. 그녀가 아무리 상처 주고 다른 남자에게 도망가도 미쉬낀은 그녀를 연민하고 신뢰한다. “당신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소설은 이렇게 질문하는 듯하다. 성스러운 백치는 모욕당한 여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소설이 건넨 답은 ‘아니요’일까. 나스따시야는 미쉬낀을 간절하게 원하면서도 파멸의 구렁텅이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신비롭고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다. “왜 고통을 예감하면서도 올가미 속으로 들어갈까요? 그게 나는 의문스러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욕당한 여자를 구원하려는 성자의 선하고 아름다운 의지가 아니라, 끝내 비극에 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을 만큼 훼손된 자의 복잡한 고통일지 모른다. 모욕당한 여자에게 구원이란 자신을 연민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손길이 아니다. 자신에게 치달아 오는 괴로움의 모든 굴곡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움직여 가는 몸부림. 나는 그 몸부림이 신비롭거나 불가해하지 않다. 지극히 논리적이며 납득된다. 내게 아름다운 것은 차라리 그런 것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