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늙은이처럼 돈 조직 운운하며 윤석열에 入黨 압박하는 이준석 보수 중도의 독자적 정체성 흐리고 자연스러운 외연 확장 가로막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공론(公論)은 크고 높은 것이어서 무엇이 공론이고 아닌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난다. MBC는 2008년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릴 것처럼 보도해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나 지금 한국인은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미국산 소고기를 아무런 걱정 없이 잘만 먹고 있다.
유승민은 2015년 여당인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더불어민주당 이종걸에게 국회가 대통령령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위헌적인 국회법 개정안에 합의해줬다. 이 뜬금없는 합의로 그는 반발을 사 원내대표에서 쫓겨났다. 그의 주장이 공론에 어긋났음은 시간이 지나 저절로 드러났다. 민주당은 여당이 된 지 오래됐지만 그런 개정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2012년 대선 당시 시대정신은 ‘안철수 현상’으로 표현된 중도였다. 김종인의 중도는 대의(大義)를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중도가 아니라 좌(左)든 우(右)든 돈과 조직을 가진 정당에 자신을 파는 중도팔이의 중도였기에 실패했다. 한 번은 박근혜 정당에, 한 번은 문재인 정당에 중도를 팔아 나라를 탄핵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그 결과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쪽에서는 ‘박근혜를 탄핵하고 이명박을 수감한 윤석열은 도저히 지지할 수 없다’며 최재형을 대안으로 삼는 일부 세력을 제외하고는 윤석열을 지지하는 경향이 높다. 이런 선택은 윤석열이 정권교체의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인식하에 ‘정권 연장을 막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한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심리로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윤석열 지지 세력의 본류는 아니다. 과거 새누리당의 탄핵찬성파, 국민의힘에도 민주당에도 속하지 않은 제3지대 세력, 민주당 쪽에서 넘어온 진보세력이 본류다. 하지만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듯이 결이 다른 두 물이 윤석열 대망(大望)론으로 합류하고 있다. 이 기이한 결합은 문재인 정권이 만들었다. 두 물이 충돌을 피하면서 합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 불만 없는 정권교체의 대(大)전제다. 윤석열의 국민의힘 입당은 그 전제를 파괴하는 자살행위다.
그저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서 배우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데서 배워야 한다. 이준석은 서울과학고와 하버드대에서 배워 디지털과 말싸움에는 능하다. 하지만 정치는 잘못 배웠다. 정작 김종인은 지금까지의 ‘제3지대 불가론’으로부터 돌아서 또 될 만한 쪽에 붙을 요량으로 딴소리를 하고 있는데 이준석은 과거 김종인에게 잘못 배운 그대로 애늙은이처럼 돈 조직 운운하면서 윤석열의 입당을 압박하고 있다.
‘찐’ 보수들이 나라는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장할 것도 주장하지 못하고 참는 사이, 독자적으로는 중도를 추구하지도 못하는 겁쟁이들이 남(보수)의 둥지를 차지하고 설치고 있다. 이준석은 사실상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깎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늘려준 뒤 ‘나쁘지 않은 스탠스’ 운운했다. 대의는 없고 술수(術數)만 있는 것이 김종인이 해온 것과 똑같다.
윤석열이든 안철수든 진중권류든 법치와 안보의 최저선(bottom line)에 대해 보수 쪽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드러냈다. 문재인 정권을 겪으면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우연히 공유한, 이 희귀한 경험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보수와 중도 모두 각자의 외연(外延)이 확장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때 그 외연을 축소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