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은 그저 속옷의 개념이었다. 1904년 미국 의류회사 쿠퍼사(Copper Underwear Company)는 ‘바느질해 줄 와이프’나 재봉 기술이 없는 미혼 남성을 겨냥해 면소재 속옷 ‘배첼러 언더셔츠(Bachelor Undershirt)’를 선보였다. 신축성 있는 네크라인으로 입고 벗기 간편하고, 안전핀이나 바늘, 단추조차 필요없다고 광고한 면소재 스웨터는 늘어나거나 구겨질 수 있지만 항상 원래의 모양대로 돌아가는 실용성을 자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T’자 형태의 티셔츠와 형태적으로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가장 아이코닉한 패션 아이템인 티셔츠의 오랜 역사가 그쯤에서 출발한 것으로 해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후 미 해군이 그 편안함과 실용성에 주목해 반팔로 변형해 군용 속옷으로 차용하게 되면서 비로소 티셔츠다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양모 소재 속옷을 대신하게 된 면소재 스웨터는 부드러운 촉감과 신축성 덕분에 곧 군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됐다. 갑판 위에서 병사들은 종종 상의를 벗고 반팔 속옷 차림으로만 생활하곤 했고, 이후 많은 밀리터리 패션 아이템이 그러하듯 종전 후 민간으로 전해지며 활동하기 편하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위대한 갯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가 1920년 그의 첫 소설 ‘낙원의 이편(The Side of Paradise)’에서 처음 ‘T-shirt’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후 티셔츠라는 이름은 점점 대중화되고 영어사전에도 당당히 등재됐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티셔츠는 명백한 속옷이었고, 티셔츠 차림으로 외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건설노동자와 광부 등이 더운 환경에서 겉옷을 벗고 작업하는 사례가 많아지며 티셔츠는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즐겨 입는 옷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역한 군인들이 돌아오면서 티셔츠를 겉옷으로 즐겨 입게 되자, 노동복 이미지가 상쇄되며 겉옷으로서 티셔츠는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티셔츠는 미국 고등학생들의 일상 품목으로까지 자리잡으며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낸시 페퍼(Nancy Pepper)는 티셔츠가 틴에이저들의 옷장을 점령한 사실과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패치 등으로 커스터마이징하는 유행을 사회 현상으로까지 언급했다. 말런 브랜도, 제임스 딘 등 당시의 은막의 스타들이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영화 속 장면에 등장하면서, 티셔츠는 젊고 반항적인 청춘의 상징이 됐고, 드디어 제대로 일상복으로 자리잡았다.
1950∼60년대에 들어서 실크 스크린 등 프린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티셔츠는 이전과 달리 다양한 메시지와 컬러를 담기 시작했다. 선거 캠페인에서는 공약과 후보의 이름을 담은 티셔츠로 유세를 이어갔고, 반정부 시위자들은 티셔츠에 자신들의 메시지를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1969년에는 티셔츠 역사상 중요한 변곡점으로 여겨지는 순간을 맞게 되는데, 지금까지도 매년 여름 핫한 아이템으로 소개되는 타이다이(Tie-dye) 티셔츠가 우드스탁에서 첫선을 보인 것. 액체 염료 발명에 기반한 타이다이 티셔츠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당시 반체제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일찍이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티셔츠의 기능적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영리하게도 이를 비즈니스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교들은 소속감을 강조하는 팀 유니폼으로 활용하기 위해 티셔츠에 로고를 새기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브랜드 로고를 담은 티셔츠를 홍보용으로 제공하며 몸 앞뒤로 커다란 간판을 달고 거리를 걸어 다니는 ‘샌드위치맨’과 같은 효과를 노린 광고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다. 가장 성공적인 홍보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의 ‘I♥NY’ 티셔츠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세계의 범죄 수도’라는 오명과 함께 파산 직전의 상황에 처해있던 뉴욕 시는 이 도시 브랜드 디자인을 담은 티셔츠로 관광객들을 유치하면서 도시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까지 슬로건이나 브랜드 로고를 새겨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티셔츠는 중요하게 기능한다.
티셔츠가 가장 사랑받는 계절 여름, 올여름 선보이는 색다른 프린트 티셔츠들도 눈에 띈다. 다양한 협업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결과물을 선보이는 브랜드 메종키츠네가 라인 프렌즈와 협업해 두 브랜드의 아이코닉 캐릭터를 한번에 담은 티셔츠를 소개했다. 키즈 라인까지 선보이면서 온 가족이 함께 입을 수 있는 패밀리 룩을 제안한다. 에버랜드의 전신인 ‘자연농원’과 에잇세컨즈의 만남도 흥미롭다. 그시절 레트로 그래픽무드를 그대로 옮겨온 이른바 ‘뉴트로’ 그래픽이 이채롭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서스테이너블 브랜드 가니(Ganni)의 티셔츠는 둥근 지구를 다양한 그래픽과 컬러로 표현하여 시리즈로 제안하며, 후면에는 지속가능한 가치를 강조한 동일한 메시지를 담았다.
네크라인이 적당히 늘어난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를 입고, 티셔츠에 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에세이집을 읽었다. 딱히 수집하려는 생각으로 모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소장하게 된 티셔츠들을 주제별로 소개하는 형식이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가 한 명이 일상에서 이런 간편한 옷을 입고 속 편하게 생활했구나 하는 것을 알리는, 후세를 위한 풍속자료’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한 사람의 옷장에 모인 티셔츠에 관한 일화들을 읽고 있으려니, 타인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본 듯한 기분도 든다. 의도하지 않았던 선택일지라도 크게는 가치관, 적어도 취향이 반영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재즈 LP판이나 마라톤처럼 티셔츠 역시 작가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여겨진다. 메시지를 담아 소통의 매개체로 오랫동안 기능해온 가장 일상적인 패션 아이템 티셔츠가, 어쩌면 심리분석이나 손금, MBTI보다 더 총체적으로 한사람을 설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편안한 티셔츠를 즐기는 나도 느긋하고 안온한 일상을 즐기는 너그러운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