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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에드워드 호퍼[움직이는 미술]

입력 | 2021-07-30 03:00:00

에드워드 호퍼의 1947년 작 ‘펜실베이니아 탄광촌’.

송화선 신동아 기자


슬픔에 유효기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이 사라지리라 믿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제 어떤 기억은 잠시 잊힌 듯해도 기어이 되살아난다는 걸 안다. 그 흔적을 삶 바깥으로 영영 밀어낼 수 없으리란 걸 힘들지만 받아들이게 됐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감독 케네스 로너건)는 애써 봉인했던 슬픔과 다시 마주하게 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리(케이시 애플렉)는 대도시 공동주택 단지에서 잡역부로 일한다. 영화 시작 후 한동안 카메라는 거리에 쌓인 눈을 치우고, 물이 새는 천장을 고치고, 막힌 변기를 뚫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별다를 것 없는 그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건 형의 죽음이다. 이 사건으로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리는 곳곳에서 과거의 흔적과 맞닥뜨린다. 이웃 모두가 알면서도 입에 올리지 않는 ‘그 사건’을 덮어둔 채 장례를 치르려 하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옛 기억까지 떨쳐내지는 못한다.

리가 얼마나 고통에 시달리는지 알게 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텅 빈 그의 눈빛이다. 리는 수많은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매 순간 철저히 혼자다. 깨진 유리조각에 찔려 손이 피투성이가 된 순간에조차 아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황량한 표정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작품을 떠오르게 한다.

호퍼는 고립과 단절의 정서를 잘 표현한 화가다. 그림 ‘펜실베이니아 탄광촌’ 속 사내는 분명 주택가 한가운데 있다. 하지만 주위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위(四圍)는 고요하고 집 안은 어둡다. 창문에는 커튼이 빈틈없이 드리워진 상태다. 사내 뒤 가파른 경사면 옆엔 어둠을 향해 이어진 회색 계단이 있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이 그림에서 사내가 의지할 건 오직 갈퀴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그는 나무 자루에 힘없이 체중을 실은 채 저 멀리, 빛이 비추는 쪽을 응시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잿빛 대도시의 고층 건물 사이에서 홀로 눈을 치우던 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에 오직 리와 삽 한 자루밖에 없는 듯하던 그 장면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호퍼의 작품에 대해 “보고 있으면 우리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평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도 그렇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