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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플래시100]하와이 뒤흔든 ‘동화정책과 일본어 강요’ 규탄 목소리

입력 | 2021-07-30 11:40:00

1925년 07월 31일





플래시백

“일본의 조선인 동화정책과 일본어 주입식 교육제도는 우리에게 치명적 속박이다. 동화정책은 조선인에게 의식을 잃게 할 뿐이고 물질적 행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연단에 선 42세의 한국인이 목청을 높였습니다. 이어 ‘조선에 대한 자본 투자는 순전히 일본인을 돕기 위한 목적’이며 ‘국유지를 차지한 동양척식회사가 일본인 농부한테만 좋은 기회를 주는 바람에 조선인은 만주나 중국으로 쫓겨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간사 신흥우는 미국 하와이에서 13개국 150여명에게 이렇게 조선의 현실을 알렸습니다. 1925년 6월 30일부터 2주일간 열린 제1회 ‘태평양회의’의 둘째 날 일이었죠.

①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회 태평양회의에 참석한 조선 대표단. 앞줄 오른쪽부터 송진우 동아일보 주필, 신흥우 YMCA 총간사, 윤치호의 딸 윤활란, 서재필, 김양수 조선일보 기자, 유억겸 연희전문 부학감. 서재필은 현지에서 합류했고 윤활란은 밴더빌트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는 길에 들렀다. 뒷줄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②앞줄 오른쪽은 유억겸, 뒷줄 오른쪽부터 신흥우, 송진우. 뒷줄 왼쪽은 현지 안내를 담당했던 이태성 호놀룰루 한인 기독청년회 총무. 나머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②출처는 독립기념관




태평양회의는 태평양연안 여러 민족의 종교 이민 교육 문화 통상 산업을  격의 없이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미국 민간학술단체 태평양문제연구회가 주도했죠. 개인 자격 참석이었기 때문에 나라 잃은 조선의 대표들도 하와이 동포들의 요청을 받아 동참했습니다. 국가 단위 참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평양회의에서 입김이 강한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었죠. 일본 참석자들은 자국의 식민지정책이 통렬하게 비판당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속 쓰리기는 미국인들도 비슷했죠.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대표가 튼튼한 정부가 수립되면 독립시켜준다고 해놓고선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고 통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①1925년 7월 4일 하와이 호놀룰루 누아누 국제청년회 체육부에서 열린 조선 대표 환영회에 모인 동포들 ②오른쪽은 신흥우, 왼쪽은 이태성. 가운데는 윤활란으로 보인다. ②출처는 독립기념관




일제는 종교‧교육‧언론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 대표들의 태평양회의 참석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총독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으려 한 이유였죠. 경성부가 여비를 대주겠다는 제안도 했습니다. 일본 대표로 가라는 뜻이었죠. 이도저도 다 거부하고 독자 참석하자 여객선에서 일본과 조선 대표 사이에 냉기류가 흘렀습니다. 회의 도중에도 독립국만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조선 대표들이 돌아가겠다고 짐을 쌀 정도였죠. 그렇지만 조선 대표들은 자체 회의를 여는 등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려고 머리를 짜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11일자 사설처럼 ‘이런 기회라도 이용해 우리 현실을 현실대로 여실히 발표하고 인도적 양심과 정치적 상식에 호소하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보았죠.


①태평양회의에 참석한 조선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하와이 동포들이 주최한 야유회 ②누아누 국제청년회 한인 아동부 어린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 ③하와이 기독학원 학생들로 조직된 호놀룰루 동자군 제19대. ②출처는 독립기념관




이맘때 동아일보 주필로 돌아와 있던 송진우는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6~8월 3개월 가까이 태평양회의 기사를 썼습니다. 6월에는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가는 여정을 4회로 소개했고 7월에는 열하루의 태평양 횡단기를 3회 실었죠.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간 뒤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도쿄로 이동할 때는 18세에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유학을 단행했던 패기와 치기를 함께 떠올렸죠. 기차를 긴 집으로 오해했고 벤또(弁当)를 ‘멜똥’이라고 발음하며 처음 타는 인력거 좌석이 위험해 보여 신발 놓는 아래쪽에 올라앉아 웃음거리가 됐던 일들 말입니다. 과거로 떠나는 송진우의 시간여행이었던 셈이죠. 세월이 지나며 눈치는 늘고 기개는 줄었다며 스스로 한탄했지만 독립을 향한 집념은 더 굳어졌습니다.




신흥우의 연설이 동아일보 1면에 실린 때는 대표단이 귀국한 뒤인 7월 31일이었죠. 이제 조선 대표의 활약상이 독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죠. 송진우는 지상중계 격인 ‘태평양회의에’를 4회, 주요 참석자 인터뷰인 ‘태평양회의를 중심으로’를 6회 연이어 실었습니다. ‘태평양회의를 중심으로’에서는 미국 캐나다 호주의 유력인사들이 3‧1운동에 감동했고 동정심을 품게 됐다는 소감과 응원을 매회 전했죠. 또 하와이 동포들의 감격 어린 환대와 함께 이승만과의 만남도 소개했습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탄핵을 받아 임시대통령에서 면직됐고 그가 이끌던 구미위원부도 폐지됐을 때였죠. 송진우는 ‘내야 무엇을 하였어요. 도리어 동포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참지 못할 뿐이오’라는 이승만의 심경을 전하면서도 외로움을 딛고 독립운동에 분투하는 그의 진지하고 위대한 인격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원문



同化政策(동화정책)과 日語(일어) 注入(주입)은
朝鮮人(조선인)에게 致命傷(치명상)
日人(일인) 投資(투자)는 移民奬勵策(이민장려책)에 不過(불과)한 것
太平洋會議(태평양회의)에서 申興雨(신흥우) 氏(씨) 演說(연설)
布哇(포와)에서 宋(송) 鎭(진) 禹(우) 特信(특신)


去(거) 七月(7월) 一日(1일) 太平洋問題硏究會議(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서 朝鮮基督敎靑年會(조선기독교청년회) 總幹事(총간사) 申興雨(신흥우) 氏(씨)는 演說(연설)하되 『朝鮮(조선)은 過去(과거) 四十年(40년)동안이나 外國(외국)에 挑戰(도전)한 일이 업섯스나 그동안에 두 번재나 그 國土(국토)가 戰塲化(전장화)하고 말엇다』고 말한 後(후) 日本(일본)의 對朝鮮政策(대조선정책)에 對(대)하야 『日本(일본)의 朝鮮人(조선인) 同化政策(동화정책) 及(급) 日本語(일본어) 注入主義(주입주의)의 敎育制度(교육제도)은 우리에 對(대)한 致命的(치명적) 束縛(속박)이다. 同化策(동화책)이 一方(일방)에 偏(편)한 繁榮政策(번영정책)은 朝鮮人(조선인)에게 意識(의식)을 喪失(상실)케 할 뿐이오 物質的(물질적) 幸福(행복)에는 何等(하등)의 意味(의미)가 업다고 述(술)하고

産業(산업)과 商業關係(상업관계)의 改善(개선)에 就(취)하야 『이에 要(요)하는 資本(자본)은 모다 銀行制度(은행제도)에 支配(지배)되며 過去(과거) 十年間(10년간) 朝鮮(조선)을 開發(개발)키 爲(위)하야 多額(다액)의 費用(비용)이 投(투)하게 되엿스나 그것은 朝鮮銀行(조선은행) 總裁(총재) 美濃部(미농부) 氏(씨)가 株主總會席上(주주총회석상)에서 말한 것과 갓치 同行(동행)은 朝鮮(조선) 滿洲(만주)에 잇는 日本事業家(일본사업가)를 援助(원조)키 爲(위)하야 莫大(막대)한 資本(자본)을 貸出(대출)하엿기 까닭에 大損失(대손실)을 招來(초래)하야 一時(일시)는 危機(위기)에 直面(직면)한 일이 잇슴과 갓치 朝鮮(조선)에 投資(투자)리는 것은 純全(순전)히 日本人(일본인)의 援助(원조)를 하기 爲(위)한 投資(투자)에 不過(불과)하다. 그럼으로 우리는 外國資金(외국자금)의 融通(융통)을 渴求(갈구)하는 바이다.

더욱이 日本(일본) 政府(정부)는 鮮日(선일) 雙方(쌍방)을 利(이)롭게 한다는 美名(미명) 下(하)에 東洋拓殖會社(동양척식회사)를 組織(조직)하야 國有地(국유지)를 同社(동사)의 所有(소유)로 맨들고 말엇다. 그런데 韓日合併(한일합병) 以來(이래)로 同社(동사)는 日本人(일본인)의 手(수)에 歸(귀)하야 日本(일본) 政府(정부)의 多額(다액)의 援助(원조)를 밧어가면서 日本(일본)에서 渡來(도래)한 農夫(농부)에게 優占的(우점적) 待遇(대우)를 與(여)하고 日本人(일본인) 農夫(농부)만에게 好機會(호기회)를 與(여)하는 까닭에 鮮日人間(선일인간)에 人程的(인정적) 紛爭(분쟁)이 끗칠 새가 업고 이 結果(결과) 朝鮮人(조선인)은 壓迫(압박)에 堪耐(감내)치 못하야 不得己(부득기) 滿洲(만주)나 中國(중국)에 逐出(축출)되고 만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물갓치 밀여오는 日本人(일본인)이 漸次(점차)로 占領(점령)하는 狀態(상태)이나 日本(일본)의 이 朝鮮人(조선인)의 放逐方策(방축방책)은 單(단)히 政治問題(정치문제) 感情問題(감정문제) 或(혹)은 一民族(일민족)의 問題(문제)가 아니라 人道生死(인도생사) 萬人(만인)의 問題(문제)이다』라고

『萬人共榮(만인공영)이 目標(목표)』
申興雨(신흥우) 氏(씨) 繼續(계속) 絶呌(절규)
布哇(포와)에서 宋(송) 鎭(진) 禹(우) 特(특) 信(신)


그리고 最後(최후)에 申興雨(신흥우) 氏(씨)는 暗然(암연)히 朝鮮獨立(조선독립)을 提唱(제창)하야 曰(왈) 『그러면 前述(전술)한 諸問題(제문제)를 解决(해결)함에 잇서서 取(취)할 바 何等(하등)의 手段(수단)을 가지지 안은 朝鮮人(조선인)은 如何(여하)한 方法(방법)을 何處(하처)에 講(강)할 것인가? 朝鮮人(조선인)의 希望(희망)하는 第一(제일)의 가장 根本的(근본적)인 것은 民族的(민족적) 自决(자결)에 잇다. 일즉이 우리는 獨立(독립)한 國家(국가)의 列(열)에 參例(참례)하엿스나 只今(지금)은 全然(전연) 忘却(망각)되고 말엇다. 그러나 殆(태)히 忘却(망각)되엿다고는 하나 참된 生命(생명)인 精神(정신)까지는 决(결)코 滅亡(멸망)한 것이 아니다. 隱蔽主義(은폐주의)로써 精神(정신)을 塗沫(도말)하는 것은 一時(일시)는 可能(가능)한 것이나 决(결)코 永續的(영속적) 塗沫(도말)은 不可能(불가능)할 것이다.

人類(인류)의 『데목클라시』는 步調(보조)를 갓치 하야 行進(행진)을 繼續(계속)할 것임으로 한 사람도 落伍者(낙오자)를 내지 안코 萬民(만민)이 다가치 나가랴는 時代(시대)가 到來(도래)할 것이다. 進路(진로)가 切開(절개)되여 公明正大(공명정대)한 『껨』의 原則(원칙)이 될 때야말로 우리는 우리의 進路(진로)를 計畫(계획)하고 過去(과거)의 悲哀(비애)와 邪惡(사악)은 忘却(망각)되여 萬人共榮(만인공영)의 目標(목표)를 보고 突進(돌진)할 수 잇슬 것이다.』



현대문

동화정책과 일본어 주입은
조선인에게 치명상
일본인 투자는 이민장려책에 불과하다
태평양회의에서 신흥우 씨 연설
하와이에서 송진우 특신


지난 7월 1일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 총간사 신흥우 씨는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조선은 과거 40년 동안이나 외국에 도전한 일이 없었으나 그동안에 두 차례나 국토가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의 대조선정책에 대하여 “일본의 조선인 동화정책과 일본어 주입식의 교육제도는 우리에 대한 치명적인 속박이다. 동화책은 한 편에 치우친 번영정책으로 조선인에게 의식을 잃게 할 뿐이고 물질적 행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였다.

산업과 상업 관계의 개선에 대해서는 “이에 필요한 자본은 모두 은행제도에 지배되고 과거 10년 간 조선을 개발하기 위하여 많은 금액의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으나 그것은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 슌키치 씨가 주주총회 자리에서 말한 것과 같이 동 은행은 조선 만주에 있는 일본 사업가를 돕기 위하여 막대한 자본을 대출하였기 때문에 큰 손실을 입어 한때 위기에 직면한 일이 있었던 것과 같이 조선에 투자라는 것은 순전히 일본인을 돕기 위한 투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국자금의 융통을 갈구하는 바이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조선과 일본 양쪽을 이롭게 한다는 미명 아래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국유지를 이 회사의 소유로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한일병합 이래로 이 회사는 일본인의 손으로 들어가 일본 정부로부터 큰 금액의 원조를 받아가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농부에게 우월한 대우를 해주고 일본인 농부에게만 좋은 기회를 주는 까닭에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 분쟁이 끊일 새가 없고 그 결과 조선인은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부득이 만주나 중국으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그 후에는 물같이 밀려오는 일본인이 점차 점령하는 상태이지만 일본의 이러한 조선인 구축정책은 하나의 정치문제 감정문제 또는 한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도와 생사가 걸린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다”라고 외쳤다.

“만인공영이 목표”
신흥우 씨 계속 절규
하와이에서 송진우 특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흥우 씨는 슬며시 조선독립을 제창하여 말하기를 “그러면 앞에서 말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취할 아무런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조선인은 어떠한 방법을 어느 곳에서 꾀할 것인가? 조선인이 희망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민족적 자결에 있다. 일찍이 우리는 독립한 국가에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망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거의 망각되었다고는 하나 참된 생명인 정신까지는 결코 멸망한 것이 아니다. 은폐주의로 정신을 덮어 없애는 것은 한때는 가능하지만 결코 영원히 덮어 없애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인류의 데모크라시는 발걸음을 같이 하여 행진을 계속할 것이므로 한 사람도 낙오자를 내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나아가는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나아갈 길이 갈라지며 열려 공명정대한 게임의 원칙이 될 때야말로 우리는 우리의 진로를 계획하고 과거의 비애와 사악은 망각되어 만인공영의 목표를 보고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