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그 옛날 천주당에 가서 그림을 보다
사람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 법이라는데, 간혹 외국 여행이 그 변화의 계기를 줄 때가 있다. 외국 여행이 쉽지 않던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인 외국 여행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이었다. 17세기에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 현지 구경을 해보겠다는 열망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오랑캐라고 멸시해오던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데 대한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 문화야말로 탁월한 ‘보편’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조선 중화주의가 팽배했으니, 딱히 직접 가 보고 싶은 심정이 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직접 가 보지 않는 한, 변화의 계기도 오기 어렵다.
하루빨리 망해 버리기를 바랐던 청나라는 망하기는커녕, 18세기에는 그 발전상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청나라의 발전이 괄목할 만하다는 풍문을 들은 조선의 ‘힙스터’들은 두 눈으로 직접 오랑캐의 발전상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더러운 오랑캐이나 중국을 차지하여 100여 년 태평을 누리니, 그 규모와 기상이 어찌 한 번 보암직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을 따라간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북경의 번화한 문물에 감탄하고 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그룹이 이른바 ‘북학파(北學派)’다. 그 유명한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이들이 그 일원이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말한다. “우리 조선 선배들은 세계 한 모퉁이의 구석진 땅에서 편협한 기풍을 지니고 살고 있다. 발로는 모든 것을 가진 중국 대지를 한번 밟아보지도 못했고, 눈으로는 중국 사람을 한번 보지도 못했다.”
그중에서도 원근법을 사용해서 핍진한 느낌을 주는 서양 회화에 큰 인상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얼핏 보고는 곧 살아 있는 개라 여기다가 다가와서 자세히 본 후에야 그림인 줄 알았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구름을 헤치고 얼굴을 드러낸 자가 두어 장(丈) 정도 깊은 곳에 있는 듯 보였던 것이다.” “필법이 정교하고 기이하여 중국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연행사와 북경 천주당’)
북학파 지식인 중에서 가장 먼저 북경 여행을 한 사람이 홍대용이다. 그가 천주당 내 종교화를 보고서 남긴 기록이 흥미롭다. “서쪽 벽에는 죽은 사람을 관 위에 얹어 놓고 좌우에 사내와 여인이 혹 서고 혹 엎드려 슬피 우는 모양을 그렸으니, 소견에 아니꼬워 차마 바로 보지 못하였다. 왕가에게 그 곡절을 물으니 왕가가 이르기를 ‘이는 천주가 죽은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을병연행록’)
홍대용이 ‘을병연행록’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천주당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처형 이후 슬픔을 묘사한 종교화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피에타’(1490년). 출처 위키미디어
프랑스 출신 화가 얀 호사르트의 ‘애도’(1520년대). 출처 웹 갤러리 오브 아트(WGA)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매장’(1512년).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