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거주 강화-임대차법 규제에
같은 단지, 층수 비슷한데도 실입주 가능한 집 가장 비싸
전월세 끼면 수천만원 떨어져 3중-4중가격 형성… 시장 혼란

최근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서 주거 여건이 거의 같은 아파트라도 세입자 유무와 임대차 계약 조건에 따라 매매가가 크게 달라지는 ‘다중 가격(multiple price)’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7월 도입된 임대차 3법 여파로 전세시장에 퍼진 이중 가격 문제가 매매시장으로 확산된 셈이다.
5일 수도권 일선 중개업소들에 따르면 실입주가 가능한 매물은 호가가 높게 형성되는 반면 전세나 월세를 낀 매물은 호가가 떨어지면서 매수자로서는 시세 수준을 알기 힘들어졌다. 정부가 다주택자를 겨냥해 규제책을 쏟아내자 주택시장이 직접 입주하려는 사람 중심으로 재편됐고 그 결과 즉시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 매물의 가치가 종전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실수요 중심 시장이 된 것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임대차 3법 도입으로 매수자들이 기존의 전세 계약, 즉 갱신 계약을 낀 매물을 기피하면서 가격 편차 문제가 생겼다. 최근 신규 계약된 전세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세를 낀 매물 간에도 가격 차가 벌어졌다. 그 결과 세입자 없는 매물, 신규 전세 계약을 낀 매물, 갱신 계약을 낀 매물, 월세를 낀 매물 등의 순서로 서열이 생긴 셈이다.
동-평수 같은 집, 즉시 입주 가능땐 6억-전세 끼면 4억8000만원
과거에도 세입자 유무에 따라 집값에 차이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임대차3법 여파로 전세 조건과 방식에 따라 전세금 격차가 커진 데다 각종 규제들이 겹치면서 매매가 격차가 종전보다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다중(多重) 가격’이 확산되면 집을 사려는 사람이 적정 가격 수준을 알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선호도가 높은 입주 가능 아파트값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집값 불안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임대차3법 등 겹겹 규제에 ‘다중 가격’ 확산
여기에 임대차3법으로 전세시장에 이중 가격이 나타나고 전세의 월세화 양상이 확산되면서 매매가에는 여러 층이 생겼다. 입주 가능한 매물과 전세를 낀 매물, 두 가지 중심의 시세가 최근에는 전세계약의 형태와 보증금 조건에 따라 삼중(三重) 사중(四重)의 매매호가가 형성된 것이다.
지난달부터 양도세 중과가 시행되며 매물이 잠기면서 다중 가격 현상은 더 심해졌다. 비슷한 조건의 매물이 많다면 세입자가 집주인과 협의해 가격을 낮출 여지가 있지만 매물이 없다 보니 입주 가능한 매물을 가진 집주인이 거래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시장은 이미 실수요자 중심으로 재편된 상태로, 입주 가능 매물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며 “전세가도 올랐지만 매매가가 더 크게 오르면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것보다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입주 가능한 집을 사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 “시세 못 믿겠다” 적정가 판단 기준 모호해져
지난달 최모 씨(40)는 서울 노원구 아파트를 해당 단지 기준 역대 최고가에 매수했다. 바로 입주가 가능한 매물이어서 전세를 낀 매물보다 3000만 원 더 비쌌지만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면 매수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입주 가능한 매물이 단지에 딱 하나여서 다른 매물보다 왜 더 비싸냐고 따지거나 가격을 낮춰 달라고 할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다중 가격 현상이 부동산 관련 통계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부동산 통계는 한국부동산원과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 모두 표본을 추출해 시세를 산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중 가격처럼 한 단지에 여러 시세가 혼재해 있다면 특정 표본이 해당 단지를 대표한다고 보기 힘들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매수자와 매도자의 조건에 따라 여러 가격이 형성돼 표본 추출 방식으로는 통계의 부정확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지나치게 많은 규제를 도입해 시장을 복잡하게 만든 결과”라고 지적했다.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