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디(FENDI) 제공
국내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민성 씨(32)는 3년째 여름마다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다. 2018년 입사할 때만해도 차마 하지 못했던 행동이다. 회사에서 자유로운 복장을 허용하고 있었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차림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대 남성 직장 상사가 반바지를 입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 김 씨는 “입사 2년차 들어 반바지에 처음 도전할 때도 주변 눈치를 많이 봤는데 우려와 달리 주변에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며 “이후론 여름마다 즐겨 입고 있다”고 말했다.
여름철 출근 복장을 간소화하자는 논의는 10여 년 전부터 이뤄졌다. ‘쿨비즈룩’이라는 이름의 반팔셔츠와 노타이 등 간편한 옷차림이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반바지만큼은 쉽사리 정착되지 못했다. ‘반바지는 격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런데 그 흐름이 최근 빠르게 바뀌고 있다. 낮 최고기온이 35도 안팎을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남성 반바지 판매량이 급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 폭염 속 ‘젠더리스 붐’ 타고 남성 반바지 인기
보테가베네타 제공
이미 패션계에서는 수년 전부터 젠더리스 패션이 대세로 자리잡아왔다. 프라다는 2022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에서 짧은 길이의 바지(shorts)에 미니 스커트(skirt)를 덧댄 ‘스코트(Skort)’를 선보이기도 했다. 펜디 2022 봄·여름 남성 컬렉션에서는 여성복으로 여겨져 왔던 크롭 톱, 일명 배꼽티까지 등장했다.
젠더리스 패션을 즐기는 스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해 6월 공개된 방탄소년단 ‘Butter’의 싱글 앨범 콘셉트 포토에서 지민은 짧은 반바지 위에 킬트(스코틀랜드 전통의상으로 남성이 입는 스커트)를 입고 페이크 퍼 부츠를 신은 스타일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전문가들은 젠더리스 트렌드가 문화 전반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남성 반바지 패션 역시 자연스럽게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패션디자이너인 간호섭 홍익대 미술대 교수는 “바로크시대에는 남성이 반바지를, 여성이 긴 치마를 입었다가 산업화가 되면서 오히려 남성이 긴바지를 입고 여성이 종아리를 드러냈다”라며 “남성 전유물이었던 반바지가 여성의 전유물이 됐다가 성과 나이구분이 없어진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같이 입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3인치 쇼츠 등 갈수록 짧고 과감하게
특히 운동하는 남성들 사이에서는 남성용 쇼츠라 불리는 3인치의 짧은 반바지도 인기다. 각종 스포츠 브랜드뿐 아니라 요가복 브랜드 젝시믹스도 남성용 3인치 쇼츠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은 “러닝 쇼츠를 비롯해 스포츠 쇼츠가 대중화되면서 일상복으로 입는 반바지 길이도 짧아졌다”라며 “오랜 집콕생활로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재택근무로 근무복과 일상복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과감하게 짧아진 남성 반바지 수요도 늘었다”라고 말했다.
● 단순한 복장코드 넘어 ‘자율성’의 상징
하지만 남성 반바지에 ‘자유로움’이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는 만큼 반바지 착용에 얼마나 개방적인지에 따라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국내 한 대기업 직원인 박승연(31·가명) 씨는 매년 여름 출근할 때마다 반바지를 입고 있다. 이 회사에서는 20대, 30대 초반의 젊은 직원 뿐 아니라 30대 말~40대 초반의 과장과 차장급까지도 반바지를 입고 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박 씨는 반바지 착용의 장점으로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장 먼저 꼽았다.
“다른 회사 다니는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래들 중 반바지 입고 출근하는 비율이 30% 정도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반바지를 입고 출근할 수 있는 회사가 좀 더 수평적이고 깨어있는 조직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자부심이 생기더라고요.”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