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금단의 땅’ 한라산국립공원지역 오름, 생성과정도 베일에 싸여

입력 | 2021-08-09 03:00:00

제주의 ‘오름이야기’ <11>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서 북쪽과 서쪽 방향으로 장구목, 삼각봉, 큰드레, 민대가리 등 고지대 오름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듯 포진했다. 분화구 형태가 뚜렷한 저지대 오름과 달리 오랜 시간 풍화작용 등을 거치면서 능선이나 들판 모습으로 변한 고지대 오름이 많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6일 오전 한라산 해발 1900m 관음사탐방로의 백록담분화구 북벽 전망대. 시가지 전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제주시 중심 하천인 한천의 발원지 탐라계곡이 백록담 북벽 밑에서 시작해 굽이굽이 이어졌다. 계곡 오른쪽으로는 왕관릉이 자리했고 왼쪽으로는 장구목과 삼각봉이 능선으로 이어졌다. 장구목 너머로는 큰드레와 민대가리오름이 살짝 보였다. 장구목은 오름인지 여부가 불분명할 정도로 외형으로는 화산체 형태로 보이지 않았다. 10만 년 이상 시간이 흐르면서 조면암 화산체가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장구목은 산악인들과 인연이 깊다. 정상 암괴에는 1983년 동계훈련을 하다가 숨진 제주대 산악부원, 1992년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 등정에 나섰다가 산화한 원정대원을 기리는 동판이 각각 새겨졌다. 장구목 능선에는 한국인 최초로 1977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1948∼1979)을 기리는 케른(케언·cairn·이정표나 기념을 위해 쌓은 돌무더기나 석총)이 세워졌다. 장구목 일대는 강한 눈보라, 순식간에 변하는 악천후, 깎아지른 듯한 절벽 등이 히말라야 고산지대와 비슷해 해외 원정을 가는 산악인의 필수적인 동계훈련 장소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 국립공원지역 오름에 다양한 이야기 간직


장구목을 마주한 왕관릉은 지상으로 나온 조면암 용암이 종(鐘) 모양으로 됐다가 풍화작용 등으로 떨어져 나간 뒤 지금은 왕관 모습을 하고 있다. 장구목 서쪽으로는 어리목계곡을 사이에 두고 큰드레와 민대가리오름이 나란히 산맥줄기처럼 뻗어나갔다. 큰드레는 과거 제주의 고지도에 보면 목장 표시가 있고, 지금도 목장용 경계 돌담 등 목축문화 흔적이 남아있다. 광복 이후 비극사인 제주도4·3사건 당시에는 주민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는데, 군경토벌대에게 사살당한 사건도 벌어졌다. 민대가리오름은 제주지역 최고의 묏자리를 지칭하는 ‘6대 음택 명혈’의 하나인 ‘해두명’으로 실제 묘가 여럿 있다.

한라산국립공원지역 오름은 어리목탐방로, 관음사탐방로 등 먼발치에서 볼 수 있을 뿐 정상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금단(禁斷)의 땅’이다. 1997년 제주도가 처음 오름 종합보고서를 낼 당시 전체 오름 수를 368개로 정했으며 이 가운데 국립공원지역 오름을 46개로 정리했다. 대부분 출입이 막혀 있다 보니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국립공원사무소 고병수 단속반장은 “전망대가 있는 어승생악, 사라오름, 윗세족은오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오름 정상 탐방이 불가능한 곳이다”며 “정기, 비정기 순찰을 하면서 단속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한라산국립공원이 지정된 1970년부터 오름 출입은 금지됐지만 이전에는 방목, 숯 굽기, 목재 채취, 기도, 제례 등을 위해 오갔던 곳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만세동산(망동산)은 우마 방목을 위해 한라산 고지대까지 올라온 목동들의 쉼터이자 일터였으며 능화오름에는 화전(火田)을 일구었던 흔적이 있다. 성널오름(성판악)의 폭포는 무더위를 식혀준 피서지였고, 볼레오름(또는 불래오름)과 영실은 불교문화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쌀손장오리와 테역장오리, 어승생악 일대는 제주도4·3사건 당시 무장대의 훈련장소로 알려졌다.

한라산 고지대 오름은 제주지역 주요 하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제주 시내 중심가를 흐르는 한천과 외도천은 장구목에서 발원하고, 흙붉은오름은 제주지역 최장 하천인 천미천의 원류이다. 큰드레왓, 민대가리오름에서 시작하는 광령천은 제주시 외도동까지 이어지고 방애오름의 산벌른내에서 시작한 효돈천은 돈내코를 거쳐 서귀포시 하효동 쇠소깍까지 굽이굽이 흐른다.


● 고지대 오름이 한라산 백록담보다 먼저 생성


이들 한라산 고지대 오름은 생성 과정이 베일에 가려 있다가 최근 연구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2019년 대한지질학회지에 게재한 논문인 ‘제주도 한라산 고지대의 다중 화산분화 기록’은 한라산 관음사, 영실, 돈내코탐방로, 장구목정상 일대 시료를 채취해 연대분석한 결과 한라산 고지대 화산활동을 18만2000∼10만 년, 9만5000∼1만4000년 전 등 크게 두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백록담 위주로 중심 분출이 이뤄졌다고 알려졌는데, 이번 연구에서 18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으로 백록담 주변 오름이 먼저 나타났으며 2만 년 전에서 1만4000년 사이 백록담 동쪽에서 현무암질 용암이 유출되면서 백록담분화구가 완성된 것으로 해석했다.

올해 대한자원환경지질학회지 수록 연구논문인 ‘한라산천연보호구역 소화산들의 화산활동기록’에는 어리목 상수원 인근 조면암이 19만2000년으로 가장 오랜 연대를 보였으며 만세동산 15만3000년, 장구목 13만5000년, 어승생악 12만3000년 등으로 조사됐다. 이 오름들의 생성이 백록담 조면암 4만7000년보다 훨씬 앞섰다. 조면암 분출을 토대로 한라산 고지대에서 최소 8회의 화산활동이 있었으며 한라산 정상 북서부에서 시작해 남부지역, 동부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록담 형성과 관련된 화산활동으로 순서를 분석했다.

한라산은 그동안 중심부에서 화산이 폭발해 완만한 사면을 형성한 순상화산체로 알려졌는데 이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오랜 기간에 걸쳐 복성 복합화산체, 단성화산체 등 오름에서 분출한 용암류 및 화산 쇄설물이 겹겹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고기원 곶자왈연구소장은 “한라산 고지대 화산활동은 제주도 화산 섬 생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부분인데도 ‘잃어버린 연결고리’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고지대에서 시추 조사를 진행한다면 보다 정확한 연대와 생성 과정을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지질조사와 더불어 국립공원지역 오름의 식생, 동물생태계 등에 대한 연구 활동도 더딘 실정이다. 구상나무, 제주조릿대 등에 대한 연구는 상당부분 진척이 있지만 장구목, 흙붉은오름, 방애오름 등 고지대 오름을 대상으로 한 동·식물 분포, 멸종위기종 서식 여부 등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사제비오름 일대는 자생지를 빼앗겨 바위로 피신한 시로미, 제주조릿대 군락의 틈을 비집고 영역을 확장하는 억새와 소나무 등이 ‘종(種)의 전쟁’을 벌이는 현장이자 기후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인데도 연구는 더디기만 하다”며 “전문인력 보강, 예산 확충 등으로 지속적인 조사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지대 오름이 저지대 오름과 다른 까닭은…

평평하거나 볼록해 형태 모호
모습 뚜렷한 저지대 오름과 대조
화산분화 형성說 등 해석 다양


한라산을 오르내리다보면 국립공원지역 오름이 저지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지대에서는 원형이나 말굽형 분화구, 원추형 등의 모습이 뚜렷한 데 비해 고지대 오름 가운데 상당수가 오름인 듯, 아닌 듯하다. 평평하거나 살짝 볼록한 형태이기 때문에 화산체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이 같은 외형 차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조면암질 용암이 풍화작용 등으로 부서지면서 형태가 모호하게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물이 스며든 조면암질 용암은 얼었을 때 부피가 팽창하면서 균열이 커지는 동결-융해 과정을 거치면서 붕괴가 진행된다. 한라산 고지대에서는 동결-융해가 저지대보다 더욱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풍화가 훨씬 빠르다. 조면암질인 백록담 서북벽, 서벽은 향후 붕괴되면서 타원형인 백록담분화구가 한쪽이 터진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고지대 오름이 화산분화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일부 학자는 한라산 백록담을 비롯해 윗세오름인 붉은오름, 누운오름, 족은오름을 퇴적층(일명 탐라층)이 돔 형태로 융기한 산체로 해석했으며 삼각봉, 왕관릉, 큰드레왓에 대해서는 퇴적층이 침식하다가 남아있는 산체로 보기도 했다. 제주지역의 한 지질학자는 “한라산, 제주도 생성과정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고지대 오름이나 백록담분화구가 융기한 산체라는 해석은 상당한 논란이 있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