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훈육에서 금해야 할 것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큰아이가 동생을 또 때렸다. 부모는 큰아이에게 정말 여러 번 동생을 때리면 안 된다고, 동생이 얼마나 아프겠냐고 타일러 왔다. 아빠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을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에게 ‘맴매’를 가져오라고 했다. 문제 행동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훈육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빠의 행동은 훈육이 아니다. 제대로 된 훈육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화가 나지 않는다. 아이를 때리지 않는다. 아빠의 훈육은 사실 ‘욱’한 게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욱’은 아이에게 폭력이다. 욱해서 훈육하나 훈육하다 욱하나 모두 폭력이다. 우리 부모들은 욱해서 나온 행동의 결과로 훈육하는 경우가 많다.
아빠가 큰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가치는 ‘무슨 이유에서라도 사람이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일 것이다. 그런데, 때리는 것으로 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이를 때리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 행위에는 ‘내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다른 누군가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안 아프게 때리거나 한 대만 때리거나 겁만 주는 것도 의미가 없다. 매로 아이를 다스리면, 자칫하면 아이에게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을 겁을 주거나 때려도 된다’는 것을 가르칠 수도 있다. 그렇게 돼서는 절대 안 된다.
사회에서 가정은 개인적이고 비밀적인 공간이다. 누가 볼 수 없는 가정 내에서조차도, 설사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강압이나 힘의 행사를 통해 남을 때리거나 억압하거나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협박할 수 없다는 그런 인식이 널리 퍼져야 한다. 그래야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폭력으로 인한 안타까운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많은 부모들이 욱해서 아이의 문제 행동에 공격적으로 잘못 대처해놓고 “얘가 좋은 말로는 말을 안 들어서” “내가 좀 욱하잖아” 식으로 아이를 탓하거나 자기 행동을 합리화한다. 제대로 훈육을 이해하는 사람은 욱하지 않는다. 화가 났다면, 아이를 때리고 있다면, 훈육이라고 명칭만 붙였을 뿐이지 훈육이 아니다. ‘너 이리 와. 너 오늘 맛 좀 봐’ 하는 심정일 가능성이 높다. 피상적으로 훈육의 자세만 잡고 있을 뿐이지, 그냥 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훈육은 실패하고 만다.
훈육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욱할 이유가 없다. 화낼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욱했다는 것은 본인의 감정 조절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자신의 문제를 축소하는 것이다. 그건 결국 자기 행동에 대해 반성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훈육하다가 아이가 말대꾸하면, 부모는 욱한다. 부모가 “그만 해”라고 했는데도 금방 멈추지 않으면, 아이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를 무시해?’ ‘나를 우습게 봐?’ 내가 낳은 내 자식한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적나라하게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내가 보살펴야 사는 네가 어디서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부모 자녀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으로 화가 나는 것이다.
통제적인 부모일수록 화가 많이 난다. 지나친 통제는 상대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넌 어리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어른이 더 잘 아니까 어른 말을 들어.’ 이런 마음이다. 이것이 어떻게 교육인가? 어쩌면 군사정권 시대 위정자들도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 시대 위정자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 선한 의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너무 사랑하고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고 해서 아이 몸에 손을 대거나 폭언을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