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톨스토이와 그 가족이 살았던 러시아 툴라주 야스나야폴랴나의 저택은 현재 톨스토이 기념관으로 보존돼 해마다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석영중 교수 제공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툴라의 작은 마을 ‘야스나야폴랴나’ 영지에서 태어나 80 평생 중 50여 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광활한 녹색 대지와 생명으로 충만한 숲에 둘러싸여 거장은 집요하게 삶을 성찰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참회록’을 기점으로 그의 거의 모든 저술은 이 문제의 답을 인간 내면에 있는 ‘신성’에서 찾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육체 속에는 예외 없이 신적 본원이 깃들어 있다.” 여기서 ‘신적 본원’이란 특정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모든 비본질적인 것을 제거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제대로 사는 삶의 조건이자 필멸(必滅)의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원한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단편 ‘주인과 하인’은 톨스토이가 생각한 삶의 본질을 압축해서 전달하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짧지만 강렬한 스토리에서 원숙기 대가의 통찰력이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인간 내면에 대한 대가의 통찰
주인과 하인은 가는 길에 최악의 눈보라에 휘말렸다. 중간에 들른 마을의 지주가 자기 집에 묵어가라고 만류했지만 바실리는 혹시라도 늦게 가서 다른 구매자에게 선수를 빼앗길까봐 여행을 강행했다. 바실리는 자신이 눈보라를 뚫고 목적지인 이웃 마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점점 더 목적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말도 썰매도 눈밭에 파묻혀 두 사람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두 사람은 눈 속에 구덩이를 만들어 그 안에 짚을 깔고 웅크리고 앉았다.
무섭게 윙윙거리는 바람과 끝없이 내리는 눈 속에서 주인과 하인은 각기 다른 생각을 한다. 허술하게 옷을 입은 하인은 자신이 필경 얼어 죽을 거라 생각하다가 탈진 상태에 빠졌다. 반면 두꺼운 털옷을 입은 주인은 눈구덩이 속에서도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이자 즐거움인 돈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불끈 용기가 솟아올랐다. “가야 하는 건데 그랬어. 어디로든 좌우간 계속 가야 했어.” 그는 가까스로 말을 일으켜 세워 올라탔다. “저 친구야 죽어도 하는 수 없지. 저 친구 인생이 뭐 대단하다구!”
인근에 있는 톨스토이의 무덤에는 묘비와 묘석, 표지판이 없다. 일체의 허세와 기념비를 거부했던 거장의 의중을 반영한다. 석영중 교수 제공
본질 아닌 것을 덮어버린 눈
무섭게 쏟아지는 눈의 상징성은 압도적이다. 눈은 길과 숲과 마을과 경계선과 표지판을 뒤덮고 우리가 세계라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린다. 욕망 속의 전진은 실제로 후퇴였거나 제자리걸음이었음이 드러난다. 빛과 소리와 온기가 사라지고 운동은 정지한다. 삶에서 인간을 에워쌌던 모든 것이 소거되면서 오로지 본질만이 이 무자비한 백색의 세상에서 살아남는다. 현실은 환영이 되고 존재의 심연에 묻혀있는 신적인 본성이 죽음의 공포에 대적하는 현실로 부상한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톨스토이 기념관 내부. 야스나야폴랴나 외에 모스크바에 있던 톨스토이의 집을 보존한 것이다. 석영중 교수 제공
필멸 앞 인간의 희생과 사랑
바실리는 죽어가면서 그동안 자신이 악착같이 매달려온 돈과 가게와 집과 토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자기가 평생 그런 것들에 매달려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니키타의 몸을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고 있는 동안 이제는 그 어느 것에도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전 존재로 느꼈다. 각별하고도 장엄한 기쁨이 몰려왔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말소시켰다. 흰 눈은 비본질적인 조건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비본질적인 삶의 방식까지 모두 지워버린 것이다.
러시아에서 전통적으로 대지에 엎드리는 행위는 순명과 속죄의 행위다. 톨스토이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대지가 아닌 다른 한 인간의 몸 위에 엎드리게 함으로써 속죄와 갱생의 사이클을 물리적으로 확장시킨다. 바실리가 필멸 앞에서 가능케 하는 희생과 사랑, 이것이 톨스토이가 생각했던 인간의 신적 본원이었다.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면서 점차 삶의 본질을 사유할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진다. 무엇이 본질인가. 본질이 아닌 것이 모두 제거된 상황에서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명의 인간이 끝없이 하얀 눈 천지에 고립된 채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에서 얼핏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