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준·국방비 한일 역전 빚 중독 vs 건전 재정의 결과 文정부 ‘재정·공공 만능’ 심각 포퓰리즘 선구안이 미래 결정
천광암 논설실장
일본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을 1만 엔짜리 지폐로 쌓아 올리면 후지산 2620개 높이라고 한다. 990조 엔에 이르는 거액이다 보니,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빚을 내는 돌려 막기가 매년 되풀이된다. 일본의 올해 예산을 한 달 지출 1000만 원 규모의 가계에 비유하면 빚 원리금 224만 원을 갚고 살림을 꾸리기 위해 411만 원을 새로 빚냈다. 인구의 고령화로 복지 수요도 매년 커지기 때문에 교육과 국방, 사회필수시설 확충 등에 써야 할 예산은 심한 압박을 받는다.
이에 따라 과거 최고 등급을 자랑했던 일본의 신용등급(무디스 기준)은 한국보다 2계단 낮고, 에스토니아 체코 등과 같은 등급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일본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세계 3위 경제 규모, 내수와 수출의 조화, 기축통화인 엔화의 지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외순자산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일본이 심각한 ‘빚 중독’에 빠지게 된 것은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피해, 재정과 공공(公共)의 힘으로 경제를 떠받치는 손쉬운 선택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외환위기로 파산 문턱까지 갔지만 피눈물 나는 구조조정을 하고, 재정건전성 유지를 최우선 정책 기조로 삼는 등 일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한일 역전론’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추월차선을 마다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본의 뒤를 따르려 한다. ‘재정과 공공 중독’으로 가는 행렬을 앞에서 이끄는 리더는 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2019년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40% 선을 유지하겠다”고 보고하자 “근거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퍼주기 재정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렸다. 홍 부총리는 오랜 불문율이었던 ‘40% 룰’을 버리고 ‘60% 룰’을 새롭게 만들어 준칙이라고 내놨다. 그나마도 각종 예외 조항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데다, 적용은 다음 정부부터 하겠다는 것이어서 노골적인 면죄부나 다름없다.
문 정부 특유의 내로남불 논리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15년 9월 국가채무비율이 40%를 넘는 2016년 예산안이 제출되자 “새누리당 정권 8년, 박근혜 정부 3년 만에 나라 곳간이 바닥나서 GDP 대비 40%(결산 기준 실제 수치는 36%)에 달하는 국가채무를 국민과 다음 정부에 떠넘기게 되었다”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이 정부는 더 심한 부담 떠넘기기를 진행하고 있다. 2019년 37%였던 국가채무비율은 내년 50%를 돌파해 2024년 60%에 육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비어가는 것은 나라 곳간뿐만이 아니다. ‘그림자 나랏빚’이라 불리는 공공기관 부채도 이 정부 들어 50조 원이 증가했다. 선심성 일자리 정책으로 고용보험기금은 바닥을 드러냈고, 보장성을 강화한 ‘문재인 케어’로 건강보험기금은 3년 후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과 정부는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낮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가파른 상승 속도와 재정 확장의 강한 중독성이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전례를 보면 국가채무비율이 40%에서 각각 100%와 152%로 급등하는 데는 3년과 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 대통령에 ‘인기 없는 재정 건전화 정책’을 뚝심 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후보가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재로선 그 반대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 중에는 국가 재정을 빚더미에 올려놓을 위험한 것들이 적지 않다.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지, 아니면 잃어버린 30년을 뒤따르게 될지 여부는 포퓰리즘을 가려내는 국민의 안목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