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대통령궁에 입성한 탈레반 부대
15일(현지 시간) CNN방송과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은 아프간 수도 카불에 위치한 대사관 인력을 이르면 16일 오전까지 전원 대피시킬 계획이다. 최소한의 인력은 남기겠다는 당초 계획을 카불 함락 하루 만에 뒤집은 것. 대사관에는 미국 외교관과 아프간 현지 지원인력을 합쳐 4200명이 근무해왔다. 이들이 패닉 상태 속에 황급히 아프간을 빠져나가면서 대사관에 걸려있던 성조기가 내려졌다.
미 국방부는 이날 자국민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카불 공항으로 병력 1000명의 추가 투입을 승인했다. 당초 3000명이었던 병력은 탈레반이 순식간에 아프간 전역을 점령해버리면서 계속 추가돼 총 6000명까지 늘어났다. 미국대사관은 이날 경계경보를 통해 카불 공항에 총격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알리며 대피를 지시했다.
●안일한 상황 오판과 부실한 대응책
美, 헬기 동원 자국민 대피 15일 미군 수송헬기 ‘CH-47’ 치누크 헬리콥터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주재 미국대사관 위를 날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요 도시를 모두 장악한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이 카불까지 장악하는 것이 가시화되자 대사관 직원과 미 외교관 등을 대피시키기 위한 헬기가 마련됐다. 카불=AP 뉴시스
이로 인해 조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이 돌아왔다”고 호언했던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까지 흔들릴 판이다. USA투데이는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은 ‘미국이 돌아왔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정책 약속을 호되게 타격하는 결과”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동맹국들이 자신들의 국가 안보 이익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중대한 정책 결정을 놓고 미국이 충분한 협의를 진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며 “앞으로 안보 문제에서 미국에 의존할 수 있을지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외신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철군 결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도와 방식이 문제라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철군 이후 상황에 대해 오판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비책도 충분히 세워놓지 않은 채 서둘러 이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철군 전이던 6월에는 탈레반의 아프간 재장악 및 아프간 정부의 붕괴 시점을 향후 6~12개월, 철군이 완료된 지난주에도 ‘향후 90일’ 정도로 잡고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불과 5주 전 백악관에서 철군과 관련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면서 “탈레반이 나라 전체를 장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아프간 병력이 잘 훈련돼 있으며 탈레반의 역량은 따라가지 못한다고 호언했고 “사람들이 미국대사관 지붕에서 (헬기로) 들려 올려지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미군은 철수 방침이 확정된 이후인 7월 초 아프간 정부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채 한밤중에 야반도주하듯 현지 기지에서 철수했다. 이런 식의 철수가 아프간 정부와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것은 물론 탈레반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바이든 행정부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당국자들은 뒤늦게야 이런 백악관의 오판을 인정했다.
●제2의 9.11테러? 우려 속 쏟아지는 비판
아프간 가즈니에 걸려 있는 탈레반 깃발
인터넷 전문매체 악시오스는 ‘바이든의 오점’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대통령의 예측이 이렇게 빠르게 틀린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지적했다. CNN방송도 “역사는 아마도 이날을 불명예로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전 중부사령관은 BBC방송에 “현재 상황은 명백하게 재앙적”이라고 우려했다.
●거센 역풍에 고심하는 바이든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