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서 발견된 38호 묘에서 발굴된 청동거울. 거울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따서 ‘소명경’이라고도 불린다. 지름 8cm.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된 점을 기준으로 이 무덤이 서기 1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인정됐다. 국립경주박물관·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한다. 경주에서 4세기 이전의 궁궐, 왕성, 왕릉이 확인되지 않으며 그 시기 신라가 영남 각지를 정복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4세기 이전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발굴된 바 없었기에 심지어 4세기 이후 북방 유목민들이 남하해 신라를 세웠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밭에 숨겨진 ‘초기 신라’
이런 학설을 수용한다면 우리가 상식처럼 되뇌는 ‘천년왕국 신라’는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러다 신라 초기사 300년을 되찾을 실마리가 우연히 발견됐다. 1978년 11월 경주시 조양동의 한 주민이 자신의 주택을 개축하던 중 토기 22점을 발견해 경주시에 신고했다.
두 달이 더 지난 뒤 착수한 2차 발굴에서 상황이 반전됐고, 새로운 무덤들을 찾아냈다. 지표에는 무덤 흔적이 전혀 없었으나 표토를 제거하자 네모난 구덩이 윤곽이 속속 드러났다. 그 속에는 목관이나 목곽 흔적이 확인됐고 각종 철기와 생소한 모양의 토기가 쏟아졌다. 특히 토기는 청동기시대 토기나 예전에 발굴된 신라토기와도 달랐다. 최 학예사는 이 토기에 ‘와질토기(기와처럼 무른 질의 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양동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무덤은 1981년 말 발굴된 38호 묘였다. 무덤구덩이 길이가 2.6m에 불과했지만 출토 유물의 수준은 대단했다. 무덤 내부에서 다량의 철기와 함께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한 청동거울이 4개나 출토됐다. 최 학예사는 거울에 기준하여 이 무덤이 서기 1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주변에서 함께 발굴된 무덤들이 1∼3세기까지 조성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견해가 국내외 학자들에게 수용되면서 미지의 세계로 남겨졌던 신라 초기 300년의 실상이 비로소 명확하게 밝혀졌다.
목관 받침으로 쓰인 쇠도끼
경주시 서면 사라리에서 발견된 130호 묘에서 발굴된 쇠도끼. 길이 27cm 내외의 쇠도끼 70점이 나란히 있었다. 철 소재이면서도 신라 초기에 화폐처럼 통용됐다. 국립경주박물관·한국문화재재단 제공
무덤구덩이 크기는 조양동 38호 묘보다 조금 더 큰 3.3m였다. 파들어 가기 시작하자 말 재갈, 쇠창과 함께 토기류가 확인됐다. 아래로 더 내려가니 망자의 유해에 착장했던 호랑이 모양 허리띠장식과 팔찌가 드러났고 그 주변에서는 칼집에 든 칼과 청동거울, 농기구 등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특히 조사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무덤 바닥에 쫙 깔린 쇠도끼였다. 길이 27cm 내외의 쇠도끼 70점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탑동 목관묘, 왕묘인가
경주시 탑동 목관묘에서 발굴된 호랑이 청동 장식은 수입품으로 추정된다. 목관묘는 2세기 무렵 경주 일대 권력자의 무덤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한국문화재재단 제공
2010년 봄 마침내 경주 중심지에서 탁월한 수준의 목관묘 1기가 발굴됐다. 이 무덤이 위치한 곳은 월성 남쪽의 탑동이며 신라 초기의 중심지로 비정되는 곳 가운데 일부다. 한국문화재재단 조사팀이 민가 개축 부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이 무덤은 사라리 130호 묘보다 조금 작았는데도 출토 유물은 훨씬 뛰어났다.
무덤 주인공의 생전 위세를 보여주는 동검은 옻칠된 칼집에 들어 있었고, 말재갈이나 쇠창 등 신라 제철소에서 만들었음직한 철기가 종류별로 출토됐다. 삼국시대 초기 각국 지배층이 권위의 상징물로 사용한 부채도 출토되었는데 몸체는 썩어 없어졌고 옻칠된 자루만 남아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청동거울처럼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한 물품이 많았다는 점이다. 함께 발굴된 호랑이, 곰, 개구리, 거북 모양 청동장식도 수입품일 가능성이 있다.
이 무덤에 묻힌 인물은 현재까지의 자료로만 본다면 2세기 무렵 경주 일원 최고의 권력자였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학계에서 그를 왕으로 지목하는 견해는 아직 없다. 대릉원 일대에 축조된 5세기 이후 왕릉에 비교해 규모가 보잘 것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