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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탈출한 아프간 한국대사 “총소리에 헬기, 전쟁 같았다”

입력 | 2021-08-18 19:34:00

최태호 대사 화상 인터뷰
탈레반이 차량으로 대사관과 20분 거리까지 진격
마지막 교민 1명 보호 위해 남았다 함께 탈출
“수송기 안에 옛날 배 타듯 오밀조밀 모여앉아 이륙”




“총소리가 들리고 우방국 헬기가 (카불) 공항을 맴돌면서 흔히 영화 보던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17일 아프간 카불에서 탈출해 중동의 한 국가에 머물고 있는 최태호 주 아프간 대사가 18일 처음으로 직접 대사관 철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날 검은색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화상 브리핑에 참석한 최 대사는 탈출 전 가로, 세로 30cm의 작은 짐 밖에 챙길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해 양복을 챙겨오지 못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카불이 탈레반에게 함락됐던 15일(현지 시간) 오전 11시 반, 주 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관에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대사관을 경비하는 경비업체가 “탈레반이 대사관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까지 진입했다”고 보고한 것. 최 대사는 당시 “탈레반이 카불 시내까지 왔지만 정부군이 반격 방어 작전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약 30여 분 뒤 아프간 내무부가 “탈레반이 카불 사방에서 진입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외교부 본부와 화상 회의를 진행하던 중 최 대사는 우방국으로부터 “모두 철수 작전에 돌입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우방국 대사 일부는 이미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대사들도 “빨리 공항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우리 대사관은 철수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문서 파기 등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공항까지 가는 길이었다. 탈레반이 카불 시내를 장악한 상황에서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대사관은 이 같은 상황을 우려해 유사시에 군용기 등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미국과 양해각서(MOU)을 체결한 상태였다. 대사관 공관원들은 미 대사관까지 5분을 차로 달렸다. 이후 대사관에서 헬기를 타고 카불 군용공항으로 향했다. 최 대사는 “우리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국가 대사관 직원들도 철수를 위해 속속 밀려들어오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아프간 군중들도 이미 탈출을 위해 민간공항 활주로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날 대사관 직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마지막 교민 1명을 함께 탈출시키기 위해 애썼다. 군 수송기 탑승 수속을 밟는 동안 일부 직원들은 이 교민에게 같이 떠나자고 설득했다. 최 대사는 “다른 대사관 직원들과 미국 시민권자들이 계속 수속하고 군용기가 떠나 교민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면서 “직원들은 일단 철수하고 저를 비롯한 3명이 남아 교민을 계속 설득해보겠다고 본부에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머지 직원들은 이날 한 차례 공습경보로 비행기가 지연된 끝에 현지 시간 오후 7시 경에야 이륙할 수 있었다. 탈레반의 카불 진입 소식을 들은 지 약 6시간 반 만에 대사관과 공관원이 철수한 것이다. 최 대사는 “이날 밤 계속 총소리가 들리고 우방국 헬기가 공항을 맴돌았다. 아프간 군중들은 민간공항 활주로를 점거하고 항공기에 매달렸다.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다음날인 16일 최 대사와 공관원들은 교민 설득에 성공해 군 수송기에 오를 수 있었다. 최 대사는 “큰 수송기였고 똑같이 모두 다 바닥에 앉았다. 옛날 배를 타듯이 오밀조밀 모여 앉는 비행기였고 탑승자 대부분은 미국인이었다”고 했다.

최 대사 등 공관원 전원과 마지막 교민이 탈출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는 이제 한국인이 없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함께 일했던 현지인들의 안전은 우려되는 상황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 정부가 지원해 건설해둔 직업교육원 등은) 저희가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탈레반은 카불 시내에 검문소를 세워 보행자들을 심하게 검문검색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정부의 공무원이었던 사람들 집을 수색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집 지하실에 숨어있거나 도망을 다니는 상황이라고 한다. 현재 아프간 인구 대부분이 탈레반 시절을 겪지 못했던 사람들이라 본보기로라도 이들을 아주 잔혹하게 통제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미국이 전쟁을 벌인 20년 동안 아프간에 서구 문명이 급속도로 확산됐고 특히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국민들이 옛날처럼 탈레반에 쉽게 지배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최 대사와 아프간 공관원들은 당분간 카타르 대사관에서 업무를 이어갈 예정이다. 최 대사는 “향후 아프간 정권 수립이 어떻게 되는지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면서 국제사회의 공동대응에 참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