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이집트가 4차 중동전쟁 당시 희생자를 추모하고 수에즈운하 운영권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카이로의 무명용사 기념비.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을 띠고 있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카이로=황성호 특파원 hsh0330@donga.com
황성호 카이로 특파원
지난해 8월 13일 중동에서는 평화를 위한 또 다른 전기가 마련됐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행정부 주도로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외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바레인, 수단 등 다른 아랍국과도 속속 외교 관계를 맺었다.
아브라함 협정이 타결된 지 꼭 1년 만에 중동 정세에 다시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웠다. 15일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이 수도 카불 등 아프간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카타르 등 중동과 인근 아랍권 각국은 이번 사태가 자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 치 앞을 가늠하기 힘든 중동 정세에 또 다른 변수가 추가된 셈이다.
美 군사적 패배 선전하는 이란
이란계 파슈툰족(42%)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 아프간의 최대 종족이다. 파슈툰족이 쓰는 파슈토어 또한 페르시아어군에 속한다. 창립자 무하마드 오마르(1960∼2013)를 비롯해 탈레반 지도부와 대원들도 대부분 파슈툰족이다.
파슈툰족, 타지크족(27%)에 이어 아프간 3대 종족인 하자라족(9%) 역시 이란과 연관이 깊다. 하자라족은 이란과 같은 시아파일 뿐 아니라 이들이 쓰는 하자라어는 페르시아어의 방언에 가까워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란 정부는 과거부터 아프간에 하자라족을 박해하지 말라고 촉구해 왔다.
5일 취임한 에브라힘 라이시 신임 이란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대미 선전 도구로 쓸 뜻을 분명히 했다. 국영 IRNA통신에 따르면 그는 16일 미국의 아프간 철수를 ‘군사적 패배’라고 평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번 상황이 아프간의 항구적 평화를 되살리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며 “이란은 아프간의 이웃 나라이자 형제국으로서 아프간 모든 구성원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 외교부 또한 17일 성명을 내고 이번 사태에 관계없이 수도 카불 주재 이란대사관, 이란과 가까운 서부 헤라트 주재 영사관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이드 하티브자데 외교부 대변인은 “카불 대사관의 상주 직원 수를 줄였지만 일상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라고 했다.
사우디·이집트 불안한 친미 국가
사우디, 이집트, 요르단 등 미국과 가까운 국가는 불안해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 후 “이슬람 율법하에서 생명을 보호하라”는 성명을 냈다.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여성 인권을 유린해 온 탈레반의 과거 행태를 겨냥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는 1996년 탈레반이 처음 집권했을 당시 파키스탄,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탈레반을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이슬람 3대 성지 중 메카와 메디나라는 2대 성지를 모두 보유한 사우디를 탈레반 측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탈레반의 극단주의 성향이다. 왕정 유지가 최대 목표인 사우디 왕실의 입장에서는 자국 내 왕정 반대파가 탈레반 같은 극단주의 조직과 손잡고 반기를 드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1979년 친미 성향의 이란 팔레비 왕조가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메카의 그랜드모스크를 점령하는 등 사우디 내 이슬람 성지는 꾸준히 테러 위험에 노출됐다. 영국의 아랍 전문 매체 아랍위클리는 사우디가 아프간이 알카에다 같은 무장 테러단체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 정세에 익숙한 이집트도 마찬가지다.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15일 카이로 대통령궁을 찾은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만났다. 시시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테러, 극단주의 확산 등에 대처하기 위해 양국 협력을 강화하는 데 큰 중요성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이 아프간 사태와 이로 인한 극단주의 무장단체의 급부상 가능성 등에 관한 대책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동 외교 허브 꿈꾸는 카타르
지난해 8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외교정상화에 합의했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이 중동 평화의 새 변수가 될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사진 출처 트럼프 화이트하우스 아카이브
카타르는 대외적으로 개혁개방을 지향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와하비즘)의 영향력도 강한 나라다. 미군의 중동 공군기지 중 최대 규모인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가 있을 정도로 미국과 깊게 협력하지만 탈레반과 하마스의 연락사무소도 보유하는 등 일종의 양면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탈레반은 카타르 내 각국 외교공관이 모인 도하의 ‘뉴디플로매틱’ 구역에 2013년 사무소를 개설했다. 탈레반이 해외에 개설한 첫 사무소였다. 미국 등 서방은 유사시 탈레반과 소통할 수 있는 안전한 통로를 원했고, 중동의 중재외교 중심지를 꿈꾸는 카타르 또한 이를 지원한 것이 맞아떨어졌다. 하마스의 대외사무소 또한 도하에 있다.
이후 현재까지 탈레반과 미국, 아프간 중앙정부와의 협상은 모두 도하에서 이뤄졌다. 현재 아프간을 탈출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미군기 또한 카불에서 도하를 거친 후 미국으로 가고 있다. 이를 감안할 때 향후 미국 등 서방과 탈레반의 협상 또한 아프간 카불이 아닌 도하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외교 허브를 꿈꾸는 카타르의 위상 또한 덩달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황성호 카이로 특파원 hsh033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