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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본색’… 여성 총살, 아이 채찍질

입력 | 2021-08-19 03:00:00

[美, 아프간 철군 이후]
“여성권리 존중” 첫 기자회견 연날… 부르카 안 입었다고 여성에 총격
공항 근처선 탈출대기 시민 폭행… 아프간 국기 든 시위대도 총살
‘폭정-인권유린’ 우려가 현실로… 美-EU “아프간 여성 보호” 성명



공포에 질린 아프간 17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인근에서 한 남성(오른쪽)이 탈레반 대원이 휘두른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품에 안고 있다.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이 소년은 축 늘어진 모습으로, 사진으로는 생사를 알 수 없다. 앞쪽 겁에 질린 표정의 어린이 어깨 왼편으로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여성의 팔이 보인다.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이날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이 공항 주변에 모여든 가운데 탈레반 조직원들이 갑자기 나타나 총과 채찍, 칼, 곤봉 등을 꺼내 들고 여성과 어린이 등 시민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무장 반군 탈레반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 참혹한 폭정과 인권 유린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지 않고 거리에 나선 여성이 탈레반에 총살을 당했다. 아프간을 떠나려 공항 근처에서 대기하던 여성과 아이들은 채찍질에 쓰러졌다. 탈레반이 아프간 국기를 든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쏴 3명이 사망했다. 탈레반은 과거 그들에게 맞섰던 아프간의 한 종족 지도자 석상도 부쉈다. 철군을 밀어붙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의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비극은 이미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17일(현지 시간) 미국 폭스뉴스에 따르면 이날 아프간 북동부 타하르주의 주도 탈로칸에서는 한 여성이 부르카를 안 입고 거리에 나왔다가 탈레반의 총에 맞아 숨졌다. 그는 남색 바탕에 흰색, 분홍색 꽃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쓰러진 여성 주변엔 피가 흥건했다. 부모와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시신을 부둥켜안았다.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가혹하게 해석하고 적용해 과거에도 부르카를 안 입은 여성을 탄압했다.

이날은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이후 수도 카불에서 첫 기자회견을 연 날이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겠다”, “여성 차별이 없을 것임을 국제사회에 확신시켜 주고 싶다”고 밝혔었다. 전날인 16일엔 ‘사면령’을 선포하며 정부 관료, 병사, 미국의 조력자들에게도 복수하지 않겠다고 했다.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고도 했다. 이 같은 메시지에 일부 외신과 전문가들은 “탈레반이 변했다”, “보다 정치적인 조직이 됐다”며 기대 섞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었다.

18일 유럽연합이사회는 아프간 여성과 소녀들의 상황에 대한 공동 성명을 내고 “우리는 아프간 여성들의 교육받고 일할 수 있는 권리, 이동의 자유에 대해 깊은 걱정을 표한다. 아프간 전역에서 여성들이 보호될 수 있기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성명에는 미국과 영국도 참여했다.



부르카 안 입었다고 ‘탕’… 쫓겨난 女앵커 “탈레반 변하지 않았다”
‘탈레반 본색’

여성 인권 보장, 말뿐이었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가운데)이 17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취재진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그는 “이슬람 율법하에서 여성 인권을 보장하겠다”며 온건 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날 타하르 지역의 한 여성이 부르카(온몸을 다 가리는 여성 의복)를 입지 않고 외출했다는 이유로 총에 맞아 숨지는 등 정국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카불=신화 뉴시스

17일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주변에서도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공항 주변에 탈레반 군인들이 나타났다. 이곳엔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탈레반은 갑자기 총, 채찍, 칼, 곤봉 등을 꺼내 들고 여성과 어린이 등 시민들을 폭행했다. 채찍질을 한 뒤에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총도 쐈다. 총에 맞은 사상자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장 사진에는 당시 참상이 담겨 있었다. 한 성인 남성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서 있었다. 축 늘어진 채 품에 안긴 아들은 초등학생 정도의 몸집이었다. 다른 사진에는 한 여성이 의식을 잃고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검은색 부르카 차림이었다. 옆에는 한 소년이 옷에 피가 묻은 채 울고 있었다. 이 여성의 생존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시민들이 채찍질당하는 모습을 보며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남성의 모습도 보였다. 영국 더선은 “1시간 만에 최소 6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아프간의 새로운 공포 현실”이라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미국 백악관에서 진행한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는 아프간 국민을 계속 지원하겠다. 폭력 사태와 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외교와 관여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뒤 탈레반은 유혈사태를 벌였다.

탈레반이 15일 아프간을 점령하기에 앞서 저질렀던 만행들도 알려졌다. 18일 미국 CNN에 따르면 지난달 12일 아프간 북부 작은 마을에서 한 여성의 집이 탈레반의 공격을 받았다. 탈레반은 15인분의 음식을 만들라고 강요했다. 여성이 “저희는 가난하다”고 하자 탈레반은 그를 AK-47 소총으로 구타해 살해하고 집에 수류탄을 던졌다. 숨진 여성은 어린 아들 셋과 딸 한 명을 둔 엄마였다. 딸은 “탈레반은 전에도 세 번이나 찾아왔고 네 번째 우리 집을 노크했을 때 엄마를 죽였다”고 말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과 달리 탈레반은 도시를 활개치고 다녔다. 소총으로 무장한 탈레반 군인들이 거리의 바리케이드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쉬는 모습도 포착됐다. 폭스뉴스가 입수한 카불 시내 영상에서는 탈레반 군인들이 픽업트럭을 몰고 질주하며 총질을 해댔다. 사람을 겨냥한 것인지 허공에 대고 쏘는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 시민은 “탈레반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미군을 도운 적 있느냐’고 묻는다”고 했다. 사면령을 내리며 ‘보복은 없다’고 공언한 것과 배치되는 행동이다.

미군이 주둔하던 20년간 사회 각계에 진출했던 여성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있다. 아프간 국영TV 유명 앵커인 하디자 아민은 자신과 동료 여성 직원들이 무기한 정직을 당했다며 “탈레반은 탈레반이다.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17일 비판했다. 탈레반은 기자회견 다음 날인 18일 아프간 국기를 앞세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해 3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쳤다. 시위대는 탈레반 점령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외친 것으로 전해졌다.

트위터에는 탈레반의 잔혹행위를 담은 영상이 잇달아 올라왔다. 탈레반이 소총과 휴대용 로켓포를 들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무릎 꿇린 뒤 위협하는 영상도 있었다. 이슬람교로 개종을 거부하는 기독교인 여성의 머리를 총으로 쏴 살해하는 영상도 올라왔다. 영상 속 장면이 벌어진 시점이 탈레반의 카불 점령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8일 AP통신에 따르면 아프간 중부 바미안주에서는 하자라족 지도자 압둘 알리 마자리의 석상이 탈레반에 의해 파괴됐다. 마자리는 1990년대 탈레반과 대립했던 인물이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카이로=황성호 특파원 hsh03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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