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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과 뱅크시의 사랑 메시지[움직이는 미술/송화선]

입력 | 2021-08-20 03:00:00

뱅크시, ‘키스하는 경찰관’, 2004년. 미국 워싱턴 제프리 다이너 갤러리 제공

송화선 신동아 기자


“세계는 오늘 지구에서 가장 어린 디에고 리카도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년)은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 목소리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춘 채 망연한 표정으로 TV 화면을 바라본다. 뉴스에 따르면 디에고는 “18년 4개월 2일 16시간 8분” 동안 살았다. 그 사이 지구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 명도 없다. 그의 죽음은 인류 종말의 전주곡인 셈이다.

영화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의 생식 능력이 사라진 2027년 풍경을 그린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 세계는 암울하다. 폭력과 테러가 횡행한다. 곳곳이 부서진 도시는 참혹한 재난 현장을 연상시킨다. 정부는 혼란을 틈타 통제와 억압을 강화해 나간다. 거리에는 “가임검사 거부는 범죄다” “불법 이민자를 신고하라” 같은 내용의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 앞에서 한 무리의 군중이 시위를 벌인다. “불임은 신의 형벌이다. 회개하라.”

주인공 테오는 갈등과 증오로 얼룩진 이 공간을 지나 사촌 나이젤의 사무실로 향한다. 나이젤은 파괴 위험에 처한 예술품을 모아 보전하는 임무를 맡은 정부 관료다. 그가 일하는 건물 앞에는 ‘예술의 방주’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테오는 ‘방주’ 안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피카소의 ‘게르니카’ 등을 만난다. 그리고 또 한 작품, 뱅크시의 ‘키스하는 경찰관’도 그곳에 있다.

카메라가 정면으로 보여주는 건 ‘다비드 상’과 ‘게르니카’ 쪽이다. ‘키스하는 경찰관’은 테오의 등 뒤에서 배경처럼 흘러갈 뿐이다. 그럼에도 정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깊이 입 맞추는 그림의 존재감은 강렬하다.

뱅크시는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체불명의 예술가다. 본명도, 나이도 알려진 바 없다. 그는 깊은 밤 아무도 없는 도시 벽에 낙서 같은 그림을 남기고 사라진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사람들은 뱅크시가 자기 홈페이지에 올리는 작품 사진을 통해 뒤늦게 그의 작업을 알아챈다. ‘키스하는 경찰관’은 뱅크시가 2004년 영국 브라이턴에 있는 한 술집 벽에 그린 작품이다. 영화에서는 벽 전체를 뜯어내 옮겨 놓은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국영화협회 소식지에 따르면 쿠아론 감독은 ‘칠드런 오브 맨’을 구상하며 뱅크시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대스타는 아니어서 수소문하면 선을 댈 수 있었다고 한다. 뱅크시의 그라피티까지 더해졌다면 파국의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뱅크시는 거절했고, 대신 ‘키스하는 경찰관’을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것만 허락했다.

쿠아론은 단 한 번, 뱅크시를 노출하는 순간을 영화 초반으로 잡았다. 마지막 청년마저 세상을 떠나고 배제와 혐오가 넘쳐나던 때,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을 듯 느껴지는 바로 그 시점에, 우리는 서로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뱅크시 작품 속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재앙을 끝낼 방법은 사랑밖에 없다는 중심 메시지는 이미 다 전달된 듯하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