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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화된 몽상…‘굴욕 개항’ 콤플렉스가 부추긴 日 해외침략”[박훈 한일 역사의 갈림길]

입력 | 2021-08-20 03:00:00

1853년 7월 일본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흑선(Black Ship)’. 매슈 페리가 이끈 미국 함대는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고, 이듬해 다시 방문해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다. 페리 함대에 굴복한 일본이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은 쇄국의 문을 열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미국 예일대 소장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일본에서는 18세기 말, 19세기 초부터 해외 팽창론이 등장한다. 당시 각국이 각축을 벌이던 유럽이라면 모를까, 임진왜란 이후 수백 년간 전쟁을 겪지 않았고, 또 그럴 위기도 없었던 일본이니 희한한 일이다. 러시아가 홋카이도 부근에 출몰하는 것을 목격한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는 “캄차카에 일본의 수도를 옮기고 사할린에 성곽을 세운 다음 연해주, 만주와 교역하여”라며, 거기서 얻은 이윤으로 일본을 영국과 비견되는 대강국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서역물어·西域物語’, 1798년). 캄차카를 고른 이유는 런던과 위도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그 ‘포부’만은 엿볼 수 있다.》

침략론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에게서 더욱 황당해진다. 사토는 순풍에 돛을 달면 하룻밤에 만주에 도달할 수 있다며 “만주, 몽골을 취하고 이 오랑캐들을 잘 다스려 이들로 하여금 남쪽으로 향하게 한다면 중국이 강성하다 해도 어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버러지 같은 만주 오랑캐들도 중국을 취한 바 있다. 하물며 일본의 병량과 대포, 화약의 위세를 갖고서 그 뒤를 잇지 못하겠는가. 십수 년 사이에 중국 전체를 통일할 것은 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혼동비책·混同秘策’, 1823년)라고까지 방언(放言)한다.


반복되는 황당한 해외팽창론

당시 동아시아에는 어떤 군사적 위기 상황도 없었다. 이 무슨 난데없는 소리인가. 백주대낮의 몽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시 이런 소리가 호응을 얻을 리 없었고 하물며 막부 당국자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1850년대 일본이 개항을 하고 국방위기 의식이 강해지자 해외팽창론이 대규모로 부활한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에조지(홋카이도)를 개간하여 다이묘(大名·지방 정부의 봉건영주)를 봉하고 캄차카, 오호츠크를 탈취하며, 류큐도 타일러 복속시켜야 한다. 또 조선을 조공하도록 촉구하고, 북으로는 만주의 땅을, 남으로는 타이완, 루손의 여러 섬을 우리 수중에 넣어야 한다”며, 나아가 오스트레일리아도 아직 영국이 일부만 점령하고 있으니 서둘러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유수록·幽囚錄’).

사토 노부히로나 요시다 쇼인은 모두 재야의 인물로 정책 결정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인물이니, 그저 잠꼬대로 치부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850년대 일본이 개항하게 되자, 정책 결정자들도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막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다이묘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의 일급 브레인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內)는 “지금 세계는 맹주가 등장해야 전쟁이 멈추게 될 것이고, 그 맹주는 영국과 러시아 중에 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해주, 만주, 조선을 병합하고, 또 아메리카 대륙이나 인도에 영토를 갖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인도는 서양이, 연해주는 러시아가 손을 뻗치고 있어 당장 이를 실현하기는 어려우므로 영국, 러시아 중 하나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가 동맹 상대로 좋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불만 달래려는 레토릭

이처럼 세계가 끊임없이 전쟁을 할 것이며 결국 한 나라에 의해 평정될 것이라는 견해는 곧잘 일본의 세계 제패라는 망상으로 연결됐다.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막부 노중(老中·수상)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는 “개국을 훗날 세계를 통일할 기초로 삼고 널리 만국과 항해·무역을 하며, 그들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국력을 기르고 무비를 튼튼히 하면, 전 세계가 일본의 위세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마침내 일본은 세계만방의 대맹주로 떠받들어지고 각국은 일본의 정교(政敎)와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호언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간에서는 가끔 간도나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토나 요시다의 허풍이야 그냥 그러려니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 결정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런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850, 60년대의 일본이 세계통일은 고사하고 한반도에 진출할 힘조차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당시 일본이 서양 열강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개항을 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레토릭이었다고 해석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말만 그렇게 했지 해외 침략을 준비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막부의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세력들도 서양 침략을 막기 위해 대선(大船)을 건조하자는 주장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모두 몽상 수준이었던 것이다. 몽상을 꾸는 이유는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서양과 중국에 대한 소국 콤플렉스, 300년간 쇄국으로 열도 안에 갇혀 있던 데서 오는 자폐적 자기인식, 그리고 개항 과정의 굴욕감에서 오는 콤플렉스 등등.

몽상도 자주 하면 여론이 되고 진짜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몽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어 줘야 하고,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야 할 정치적 이유와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일본에서 비등하기 시작한 정한론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정말로 당장 조선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았다. 진짜 목표는 내부의 권력 투쟁, 정치 상황의 수습에 있었다.


국내 정치 불만 해외로 돌리기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정한론은 당시엔 내부 정치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국내 정치 상황을 통제하려던 ‘고약한 방편’은 훗날 일본의 해외 침략으로 이어진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메이지 유신 3걸 중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1869년 “조선을 정벌하면 일본의 국위를 세계에 떨치고, 국내의 민심을 국외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며 정한론을 주장했다. 이 발언의 후반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막부를 타도하면 자기들 세상이 오고 서양 오랑캐들을 쫓아낼 수 있을 거라고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메이지 정부는 사무라이 계층을 해체시키고 서양과는 우호관계를 선언해 버렸으니 이들의 불만이 어디로 향할지는 명약관화했다. 자칫 메이지 정권으로 향할 이들의 에너지를 대외전쟁으로 돌리는 걸 기도는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국내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정한론을 바꿀 수 있을 것이었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장하고 일왕의 허락까지 받아내자, 기도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협력해 이를 분쇄했고, 이듬해인 1874년에는 대만 파병에도 반대했다. 그에게 정한론은 국내 정치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방편치고는 고약한 방편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