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주민센터 복지인력 30% 방역 투입… 시민들이 ‘복지 공백’ 메워 시민이 시민을 돌본다 천사는 평범한 시민이다 이웃이 친구처럼 편하다
반찬 나눠주고…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관악구 조원동의 한 원룸에서 복지통장 박조순 씨가 홀로 사는 52세 정영호(가명) 씨에게 반찬을 건네고 있다. 박 씨는 2월 왼쪽 다리가 마비돼 집에서 꼼짝하지 못하던 정 씨 사례를 동 주민센터에 제보했다. 박 씨는 매주 목요일 찾아가 반찬 등 생필품을 전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통장님, 우리 빌라에 사는 50대 남성이 몇 달째 보이지를 않아요. 한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해 말부터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셨는데….”
2월 5일 오전 11시 30분경 서울 관악구 조원동의 11통장 박조순 씨(60)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10년 넘게 알고 지내온 동네 주민의 다급한 요청에 박 씨는 점심 식사 준비를 하다 말고 집 밖을 나섰다.
○ 고독사 위기 50대 남성 구한 통장
박 씨는 집에서 도보 2분 거리에 있는 빌라에 도착했다. 남성이 살고 있는 집 초인종을 눌러보고 수차례 문을 두드려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5분가량 기다리다 하는 수 없이 건물 관리인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배고파서 커피 타 먹었어요. 제일 맛있고 싸요.”
집 안으로 들어서니 19.83m²(6평) 남짓한 단칸방엔 오물과 라면 부스러기, 먹고 버린 믹스커피 봉지 수백 개가 쌓여 있었다. 2019년 12월까지 에어컨 설치 기사로 생계를 이어오던 정 씨는 지난해 초 갑작스레 왼쪽 다리가 마비돼 거동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가족과는 20대 때부터 연을 끊고 살아 왕래가 없었다. 가장 심각한 건 치매 증상을 의심케 할 정도로 의사소통이 어렵고 말이 어눌했다는 점이었다.
박 씨는 곧장 주민센터 복지 담당자에게 이 상황을 제보했다. 하지만 “정영호라는 분은 우리 동네에 살지 않는 걸로 나온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 씨는 7년 넘게 관악구 조원동에 살면서도 전입신고 하는 법을 몰라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조원동주민센터 관계자는 “구에서는 정 씨의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며 “통장의 제보 덕분에 올 2월 10일 전입신고를 마쳤다. 현재 정 씨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등록돼 생계비와 주거 지원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 코로나19 사태 후 복지 빈틈 채운 시민들
그런데도 박 씨처럼 시민이 시민을 돌보는 안전망이 되어주려는 이웃이 늘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명예사회복지공무원이나 우리동네돌봄단 등에 참여해 동네 위기가구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시민이 2018년 7469명에서 지난해 3만7015명으로 늘었다. 서울시는 2018년부터 지역 통장과 반장, 집배원, 슈퍼마켓 직원 등 동네를 가장 잘 아는 주민을 명예사회복지공무원이나 이웃살피미 등으로 임명해 지역을 함께 돌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대면 복지 서비스에 제약이 생겼지만 두꺼운 동네 안전망이 그 틈을 메웠다. 위기가구로 발굴돼 지원을 받은 수혜자는 2018년 5만4521명에서 지난해 22만7434명으로 2년 사이 4.1배로 늘었다.
복지 사각지대를 발굴하는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인력의 3분의 1가량이 방역 현장에 투입돼 생긴 인력 공백을 통장 등 인적 안전망이 채워준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해 서울시 전체 위기 가구 발굴·지원 수의 22.9%가 인적 안전망을 통해 이뤄졌다”며 “위기가구 5건 중 1건은 시민이 찾아내 지원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지역돌봄복지과 소속 송해욱 주무관은 “코로나19 사태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이지만 시민들이 생각보다 서로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며 “우체통에 쌓여 있는 우편물을 보고 주민센터에 제보해 한동안 집에서 은둔하던 어르신들의 안부를 확인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 ‘콜’ 하면 1, 2분 거리서 출동…시민들 “이웃이라 더 편해”
홀몸노인 건강 기록 ‘빼곡’ 서울 은평구 역촌동 복지통장 백승자 씨가 가지고 있는 위기가구 명단에는 매일 전화를 걸 때마다 백 씨가 기록한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다. 4일 백 씨는 한 홀몸노인과 통화하며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 입원. 자주 연락해줘야 할 듯’이란 기록을 남겼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8일 오후 3시경 역촌동의 한 골목에서 만난 백 씨는 위기가구 180여 명이 적힌 명단 노트를 손에 쥐고 있었다. 백 씨는 명단을 가리키며 “이 동네에서만 30년을 살다 보니 상당수는 이미 얼굴을 알고 지내던 이웃”이라며 “이웃들도 제 얼굴을 알고 있으니 처음 건 전화도 반갑게 받아준다”고 말했다. 백 씨의 노트에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통화하며 적어둔 이웃들의 상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7월 28일 ○○○ 어르신. 팔이 부러지셔서 퇴원 후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신다고 하심.’
‘8월 2일 △△△ 어르신. 안면마비가 생겨서 병원 내원 중.’
‘8월 4일 □□□ 어르신.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 입원. 자주 연락해줘야 할 듯.’
주민 입장에서도 일일이 찾아서 눌러야 하는 주민센터 내선번호보다 통화 버튼 한 번에 전화가 연결되는 이웃이 편하다고 한다. 이달 4일 오후 6시경 백 씨의 휴대전화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평소에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홀몸노인 A 씨였다.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숨을 못 쉬겠어요. 다른 데 전화하려니 몇 번을 눌러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여기로 걸었어요.”
전화를 끊고 백 씨는 곧장 119에 어르신 댁 위치를 알려 출동을 도왔고, 주민센터 복지플래너에게도 “어르신 댁에 방문해 달라”고 당부했다. 백 씨는 “제가 먼저 전화를 걸기도 전에 저를 찾는 전화가 일주일에 1, 2통씩 걸려 온다”고 했다.
“지난달엔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새벽부터 전화를 걸어 ‘집에 쌀밖에 없는데 김치 좀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고 하셨어요. 말 없고 무뚝뚝한 어르신이 어떤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을지 먼저 생각했죠. 가족에게도 터놓기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멀리 있는 가족보다 이웃이 더 가까우니까, 전화 한 통이면 금방 오니까 저한테 전화를 건 게 아닐까요.”
무엇보다 홀로 사는 주민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지켜봐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60대 남성 이종구 씨는 백 씨가 찾아오는 매주 수요일이면 대문을 열어놓는다. 18일 오후 3시 30분경 백 씨와 함께 찾은 이 씨의 집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이 씨는 “한평생 고아로 자랐고 10년 전 암 투병에 최근 당뇨 합병증까지 얻으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며 “(백 씨가) 가져다주는 반찬도 큰 도움이 되지만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 “나도 잘 살고, 같이 잘 살자고 하는 일”
방역용품 전달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역촌동의 복지통장 백승자 씨(왼쪽)가 ‘중장년 독거가구’로 분류된 이종구 씨 집을 방문해 마스크 등 방역물품을 전달하고 있다. 이 씨는 백 씨가 오는 수요일 오후 3시 무렵이면 대문을 열어둔다고 한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백 씨의 권유로 이웃 돌봄 활동을 시작한 동생 백승진 씨(57)는 처음엔 “돈도 안 되고 몸만 힘든 일을 왜 같이 하자고 하느냐”며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꼭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언니 백 씨는 “우리가 사는 우리 동네 좋아지라고 하는 일”이라며 설득했다.
동생 백 씨는 “언니를 따라서 3년째 이웃 돌봄 활동을 하면서 혼자 사는 중장년과 노인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됐다”며 “가끔은 저 역시 먹고살기 어려워 내가 왜 남의 일에 나서서 이 고생을 할까 싶다가도 제가 건 전화 한 통에 ‘덕분에 오늘 처음으로 말해봤다’는 분들이 계셔서 멈출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우장산동에 사는 이경화 씨(60)가 우리동네돌봄단 활동을 시작한 이유도 “내가 사는 동네가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 씨는 올 4월 바로 옆 빌라에서 매캐한 타는 냄새를 맡고 119에 화재 의심 신고를 했다. 소방대원이 출동하기도 전에 이웃이 사는 집을 찾아가 보니 베란다에 설치된 가스레인지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치매에 걸린 81세 할아버지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함께 사는 할머니가 소족을 끓이다가 깜빡 잊고 일하러 나갔던 것이다. 이 씨는 곧장 주민센터에 연락해 어르신 댁에 ‘가스밸브 차단장치’를 설치했다.
“우리 동네는 지어진 지 40년 넘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한 집에서 불이 나면 죄다 피해를 입어요. 제가 하는 활동이 희생이라고만은 볼 수 없어요. 나도 잘 살자고, 우리 같이 잘 살자고 하는 일이죠.”
○ 파편화된 사회, ‘이웃 안전망’ 중요성 커져
전문가들은 한 동네에서 이웃이 이웃을 돌보는 인적 안전망이 복지 사각지대를 더 촘촘히 채워줄 것으로 기대한다. 홍영준 상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족과도 연락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선 가족을 통해 복지 서비스를 신청하던 신청주의 모델이 작동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직접 동네를 찾아다니며 위기가구를 발굴해야 하는데 현재 복지 인력만으로는 사각지대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 국가 주도의 복지 안전망 확충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비 등 유인책을 마련해 이웃 사이에 서로 안부를 챙기는 일상의 복지망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렇게 채워진 복지의 빈틈이 고립된 채 살아온 이들의 마음을 채워주기도 한다. 고독사 위기에 놓였던 조원동 주민 정 씨는 통장 박 씨를 만난 뒤 일상의 변화가 찾아왔다. 생전 처음 건강검진을 받았다. 구에서 밑반찬 서비스를 연계해 끼니 걱정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지난달 8일 오후 3시경 통장 박 씨는 주민센터에서 제공하는 반찬을 챙겨 정 씨 집으로 향했다. 무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찾아간 골목에 정 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 기다렸냐”는 박 씨의 말에 정 씨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씨는 냉장고에 반찬 통을 쌓아놓고 부엌을 살피다 “설거지는 왜 안 했느냐”며 친누나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한바탕 집 청소가 끝나고 집 밖을 나서는 길. 뒤돌아서 나가려다가도 자꾸만 생각나는지 박 씨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다음 주 목요일에 또 반찬 갖고 올게요. 그때까지 커피만 마시지 말고 반찬 골고루 챙겨먹어요. 설거지도 제때 하고요. 참, 너무 더운 날엔 돈 생각하지 말고 선풍기도 꼭 켜놓고 있어야 해요.”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소정 기자 so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