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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뭐길래” 접종 때문에 이혼하는 미국 부부들

입력 | 2021-08-24 14:00:00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백신을 맞고 나면 기뻐야 정상인데 말이죠.”

미국 워싱턴 주에 사는 제임스 씨(54)는 4월 코로나19 백신을 맞았을 때 기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백신을 맞는 것은 지극히 옳은 선택인데 왜 우울한 기분이 들었을까요.


제임스 씨는 아내 몰래 백신을 맞았습니다. 아내 알리나 씨는 ‘안티 백서(anti-vaxxer)’라고 불리는 백신 접종 거부자. 아내는 자신의 접종 거부는 물론 남편에게도 “백신을 맞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아내로부터 “만약 나 몰래 백신을 맞으면 이혼”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제임스 씨는 “백산을 맞은 뒤 ‘아, 이제 나는 이혼이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합니다.

제임스 씨처럼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둘러싼 부부 갈등이 이혼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부부 중 어느 한 명이 열렬한 백신 거부자일 경우 접종 여부가 가정불화의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허핑턴포스트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으로 인해 가정불화를 겪는 부부 5쌍의 사연을 조명했습니다. 5쌍 부부 중 3쌍이 이혼 수속을 밟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백신 거부론이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와 사정이 많이 다르죠. 오랫동안 미국의 백신 거부론이 안전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면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거치면서 음모론에 뿌리를 둔 거부론이 급속히 파고들었습니다. 뉴스맥스, OAN 등 극우 언론매체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백신 거부 논리들은 의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음모론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국제 비영리 정보분석 기구 ‘퍼스트 드래프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음모론과 안전성 문제는 이제 거의 같은 비중으로 백신 거부 논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알리나 씨가 접종 거부자가 된 것은 2016년 우연히 ‘백스트(Vaxxed)’라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뒤부터였습니다.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내용의 다큐입니다. 이후 소셜미디어에 돌아다니는 각종 백신 정보를 익힌 알리나 씨는 백신 음모론으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는 “백신은 세계 질서를 뒤엎기 위한 사악한 계략”이라는 주장이 담긴 수백 건의 비디오와 자료들을 그에게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제임스 씨는 밤을 새워가며 반박 자료를 만들어 아내에게 보여줬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퍼지자 알리나 씨는 산 속에 통나무집을 빌려 접종 거부자 모임을 열고 “종말에 대비한다”며 채소밭을 가꾸고 닭을 키웠습니다. 접종 며칠 뒤 이혼 절차를 밟기 시작한 제임스 씨는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당신의 근거 없는 백신 논리 때문에 우리 결혼 생활이 끝장 나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을 수도 있다”도 답했습니다. 제임스 씨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부부들을 인터뷰한 허핑턴포스트 기자는 제임스 씨 부부가 결코 놀랍거나 드문 사례가 아니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임스 씨가 최종적으로 백신 접종을 택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경우 이혼 위협을 받는 배우자는 “내가 이혼을 감수하면서까지 백신을 맞아야 하나”는 생각에 접종을 포기한다는 것이죠,

40대 중반 캐리 씨의 경우는 남편이 접종 거부자입니다. 남편 앤서니 씨는 2월 무증상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2주 격리 기간 동안 “왜 나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가”에 대해 인터넷을 뒤지며 자료를 찾던 그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당국의 사망자 집계는 조작된 것이다” 등의 정보를 믿게 됐습니다. 캐리 씨에게 “백신을 맞으면 2년 내에 사망한다”고 주장을 펴기 시작한 그는 아내가 자기 몰래 접종을 완료하자 “당신은 곧 죽게 됐다”며 통곡을 했습니다. 또 “만약 8살짜리 딸도 접종시킬 경우 이혼 도장을 찍으라”는 서면 통보장을 아내에게 보내왔다고 합니다.


더 심한 경우는 부모와 자식 간 갈등입니다. 부모가 접종을 반대할 경우 자식은 부모와 대립해야 합니다. 미국의 접종 거부자들은 40~60대 중장년층 공화당 지지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자녀들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삶의 가르침을 줬던 부모와 가장 기초적인 의학 상식을 두고 싸우는 것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고 합니다. 백신 접종을 둘러싼 부모 자식간 갈등 사례들도 분석한 허핑턴포스트는 “절연(絶緣)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전합니다.

아만다 씨(26)의 사례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백신에 위치 추적 마이크로칩 물질이 내장돼 있다고 믿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감시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죠. 어머니는 딸은 물론 암 투병 중인 남편(아만다 씨 아버지)의 접종마저 막고 있습니다. 눈물로 설득도 해보고 소리를 질러가며 싸움도 해봤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무력감을 느낀 아만다 씨는 어머니를 더 이상 찾지 않고 관계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열렬한 백신 접종 거부자가 있는 가정의 구성원들은 대응 매뉴얼이 없는 점을 가장 안타까워합니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에는 접종 거부자들의 신념을 고취시키는 거짓 정보는 난무하지만 접촉 빈도가 높은 가족 구성원들이 이들을 어떻게 설득시켜 접종 대열로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접종 문제로 갈등을 겪는 가정을 위한 지원 상담 네트워크도 갖춰져 있지 못합니다.

8월 중순 현재 1회 이상 접종 60%, 2회 접종 완료 51%(미질병예방센터 통계) 수준에서 좀처럼 상승하지 못하는 미국의 접종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매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가족 설득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설득 과정을 ‘재교육(deprogram)’ 또는 ‘온건화(deradicalization)’라고 부릅니다. 미국 백신 거부자들의 그릇된 신념을 깨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줍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