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서 무장해제하고 협조한 뒤 레닌에게 불려가 상 받은 행적 만주서 독립군 功 상쇄하고 남아 최고 훈장 수여 가당치 않았다
송평인 논설위원
동아일보는 한소(韓蘇) 수교 직후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소련 측 정부 문건을 발굴해 소개한 적이 있다. 문건 중에는 홍범도의 신상명세를 밝혀주는 1930년대의 각종 증빙서류도 있었다. 그가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 등은 홍범도 연구의 필수 자료가 됐다.
홍범도는 192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그의 이력서에는 단순히 원동(遠東)민족혁명단체 대표회의 참석차 가서 레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다”로 돼 있다.
유혈사태는 같은 해 6월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장갑차 대포를 동원해 공격한 소련군 문서에 따르더라도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이다. 코민테른 전권위원 오홀라는 익사자 60명을 포함해 전체 사망자를 160명으로 추산했다. 독립군 측은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홍범도는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 그가 같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데까지 가담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자유시 참변 보고로 레닌을 만났을 때 레닌의 서명이 새겨진 권총과 금화 100루블을 상으로 받은 사실, 자유시 참변에서 당한 김창수와 김오남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히 중립적이었다고 보기 어렵게 만든다.
홍범도의 빨치산 증명서에는 활동 기간이 1919∼1922년으로 나온다. 그는 이력서에 “1913년 일본인들의 수배를 당해 소련의 극동지역으로 건너와 1919년까지 머물렀다”고 적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그 무렵부터 그는 볼셰비키 이념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1920년의 일이니 그는 빨치산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이다.
그는 1927년 볼셰비키 당원이 됐으며 1937년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 이주를 겪었으면서도 말년에 파시스트와 싸우는 데 나가겠다고 나서는 등 소련 정부에 충성했다. 스스로를 독립군보다는 빨치산으로 여겼기에 청산리 전투 후 일본의 대대적 반격에 쫓겨 다시 소련 영내로 들어갔을 때 소련군의 명령에 순순히 응해 무장해제를 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같이 싸운 김좌진 이범석 등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문재인 정부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서 외교노선보다 무장투쟁노선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새로운 무장투쟁 시대를 여는 여명이 아니라 황혼의 장엄한 피날레였다. 황혼 뒤의 어둠은 자유시 참변으로 찾아왔다.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됐다. 무장해제에 순응한 한인 빨치산 부대도 교육·훈련 부대가 돼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렇게 홍범도의 빨치산 이력도 1922년으로 끝났다.
홍범도의 유해를 싣고 오는 비행기가 한국 영공에 들어서자 공군 전투기가 6대나 호위했다. 이승만 등 해외에서 숨진 건국의 아버지들도 받지 못한 대우다. 오늘날 대한민국장을 받아야 할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인 백선엽 장군이 별세했을 때는 문상도 하지 않은 대통령이 유해를 맞기 위해 한밤에 공항까지 나왔다.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식에서의 대통령 연설 속에 자유시 참변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기괴하고 기만적인 서훈이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