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가 록이었어요. 환상적인 드러머였죠.”
록밴드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79)가 80세를 일기로 별세한 영국 록밴드 ‘롤링 스톤스’ 드러머 찰리 와츠에 대해 이렇게 추모했다. 24일(현지시간) 트위터에 50초가량의 추모 영상을 남기고 “굳고 단단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는 1960년대 영국 출신 밴드들이 대거 미국 시장에 진출한 흐름을 가리키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쌍두마차였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와츠는 화려한 록 스타나 팝 아이돌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동료들처럼 과감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재즈 성향을 지닌 스윙을 연주하며, 그 세대의 가장 훌륭한 록 드러머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만족했다. 일부 록 드러머들이 커다한 음향과 폭발하는 듯한 연주를 쫓을 때 와츠는 섬세함과 스윙, 그루브에 신경 써 연주했다.
키스 리처즈는 지난 2010년 펴낸 자신의 자서전에서 “찰리 와츠는 언제나 음악적으로 내가 편히 기댈 수 있는 침대였다”고 썼다.
미국 록 음악의 전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드러머 맥스 와인버그의 1991년판 책 ‘더 빅 비트(The Big Beat)의 서문에서 “믹의 목소리와 키스의 기타만큼 찰리 와츠의 스네어 사운드가 롤링 스톤스”라고 그를 추어올렸다.
열 두 살에 재즈의 매력을 발견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엘링턴, 찰스 밍거스의 팬이 됐다. 해로우 미술학교를 졸업한 와츠는 한 때 런던 광고 대행사의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에 대한 동화책 ’오드 투 어 하이플라잉 버드(Ode to a Highflying Bird)‘ 삽화를 그렸다. 퇴근 뒤에는 다양한 장르의 그룹과 함께 드럼을 연주했다.
롤링스톤스는 1962년 재거와 리처즈를 중심으로 브라이언 존스, 토니 채프먼 등이 가세하면서 결성됐다. 이듬해 채프먼이 탈퇴한 후 와츠가 영입됐다. 밴드의 원래 이름은 ’리틀 보이 블루 앤 더 블루 보이스‘. 존스가 좋아하던 뮤지션 머디 워터스의 노래 제목을 따와 팀 이름을 바꿨다.
1963년 데뷔싱글 ’컴 온(Come On)‘을 내놓은 이후 이 팀은 세계적인 밴드가 됐다. 30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9장이 미국 차트 1위, 10장이 영국 차트 1위에 올랐다. 198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롤링스톤스의 주된 이미지는 거친 나쁜 남자다. 하지만 와츠는 섹스와 마약을 삼갔다. 1964년 미술학교 학생이자 조각가와 조용히 결혼했다. 투어 중에도 혼자 호텔 방으로 돌아가, 자신의 방을 스케치했다. 1967년 이후 투어 도중 잠든 모든 침대를 그렸다는 일화도 있다.
패션 감각도 뛰어나 항상 옷을 멋지게 차려 입는 신사로 통했다. 특히 멋스런 조끼를 잘 갖춰 입었다. 2004년 후두암이 발견돼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연주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드러머들의 드러머로도 통했다. 2016년 미국 헤미베탈 밴드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는 빌보드와 인터뷰에서 “난 70대까지 계속 연주하고 싶었기 때문에 와츠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다. “내 로드맵은 찰리 와츠뿐이다.”
와츠는 1996년 롤링 스톤과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드러머가 되고 싶었다. 다만 아레나 경기장보다는 좀 더 친밀한 환경을 상상했다. 항상 찰리 파커를 앞에 두고,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들인) 블루 노트나 버드랜드에 있는 듯한 상상을 했다”고 말했다.
말년에 와츠는 영국 남서부의 한 농장으로 이주해 말들을 키우며 살았다. 뉴욕타임스와 빌보드 등 외신은 와츠가 런던의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건강 문제로 곧 진행되는 롤링스톤스의 미국 투어 명단에 빠졌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