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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주제-인물 정하고… AI가 소설문장 직접 썼다

입력 | 2021-08-26 03:00:00

국내 첫 AI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 창작과정 언론간담회
‘소설 감독’ 참여한 김태연 소설가
“AI소설 아직 완전하지 않은 단계… 구조적 판단-은유는 놀라운 편
기술발전땐 창작패러다임 바뀔 것”




“수학적 도전인 동시에 문학적 도전이었다.”

2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서점에서 열린 신간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파람북) 언론간담회에서 소설가 김태연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AI)이 쓴 이번 장편소설에서 소설가가 아닌 ‘소설 감독’이라는 생소한 역할로 참여했다. 이날 그는 “AI 소설은 인간에 비하면 아직 결코 완전하지 않은 단계”라면서도 “AI가 보여준 구조적 판단과 은유는 충분히 놀라웠다”고 평가했다.

국내에서 AI가 쓴 단편소설이 발표된 적은 있지만 장편소설은 처음이다. 신간은 김태연의 기획과 연출 아래 AI 소설가 ‘비람풍(毘嵐風·불교신화에서 우주의 최초와 최후에 부는 거대한 폭풍)’이 559쪽에 걸쳐 쓴 장편소설이다. 비람풍은 김태연이 2015년 세운 AI 스타트업 ‘다품다’가 자연어 처리(NLP) 스타트업과 손잡고 개발한 AI 소설가다. 일반인이 쓰는 자연어를 컴퓨터로 분석하고, 이를 소설 작법에 특화시킨 결과물이다. 김태연은 “비람풍은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을 뜻한다. AI 장편소설의 신기원을 연다는 의미를 담아 명명했다”고 말했다.

신간은 지체장애인 아마추어 수학자와 벤처사업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 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5명이 각자에게 주어진 수학적 수수께끼들을 풀어 나가는 이야기다. 수학과 컴퓨터공학 전문가인 김태연의 커리어가 강하게 반영된 서사다.

소설 집필 과정에서는 김태연과 비람풍은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우선 김태연이 소설의 주제와 배경, 등장인물을 정했다. 전체 서사 구조와 첫 번째 장도 그가 썼다. 이를 바탕으로 비람풍은 내용을 구체화한 뒤 소설 문장을 직접 썼다. 예컨대 김태연이 ‘이미지라는 이름의 여성 정신과 전문의가 할아버지 연락을 받고 서울 삼성동의 할아버지 집을 방문한다’는 상황을 주면 비람풍은 ‘이미지가 대학병원 주차빌딩에서 3개동이 삼각형인 삼성동 아파트까지 계속 신호를 위반하며 흰색 독일제 승용차를 힘껏 몰았다’는 문장을 만드는 식이다. 김태연은 “저작권이 이미 만료된 문학작품 등 단행본 약 1000권과 수많은 신문기사들이 비람풍의 학습재료가 됐다”고 설명했다.

비람풍이 쓴 부분을 편집하는 과정에선 사전에 예상치 못한 상황도 발생했다. 총 81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소설 앞뒤로 아무 문장 없이 정육면체 도형 1개만 그려진 ‘에피소드 0’이 비람풍에 의해 삽입된 것. 비람풍 개발업체 관계자는 “비람풍은 집필에 앞서 소설 전반에 걸쳐 활용되는 폰 노이만(1903∼1957)의 ‘집합론’을 학습했다. 그에 따르면 0은 공집합(空集合)이고 현대수학의 배경에는 공집합이 있는데 비람풍이 이를 소설 구성에 반영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AI 소설가가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분야는 자료 검색이다. 이 때문에 소설에 지나치게 자세한 내용이 들어가기도 했단다. 김태연은 “나조차 모르고 있는 수학 지식을 비람풍이 지나치게 길게 늘어놓아 많이 삭제해야 했다”고 했다.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소설 중 운문 형식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은 김태연이 새로 썼다. 개발과 더불어 소설 속의 작은 상황들을 AI에 입력해야 했기에 집필 기간도 거의 7년이나 걸렸다. 김태연은 “기술이 발전하면 앞으로 창의적인 작품 구상에 소질이 있는 작가들은 집필보다 구상에 더 매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