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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닫아버린 공간들[공간의 재발견/정성갑]

입력 | 2021-08-27 03:00:00

정성갑 한 점 갤러리 클립 대표


최근 책 한 권을 재미있게 읽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이다. 독서가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는데 이제야 연이 닿았다. 1982년 일본의 고급 별장지 가루이자와.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위해 집의 문손잡이는 가급적 나무로 한다’는 규칙이 있을 만큼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는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는 여름이면 이곳 별장으로 사무실을 옮겨 작업한다. 그곳에서 보낸 어느 해 여름을 신입 건축가 시선으로 담담하게 풀어낸 책은 맹렬한 전개와 하이라이트랄 것도 없이 누군가에게 우물처럼 깊이 남은 한 계절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에 관해 이야기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사무소 직원들이 돌아가며 제철 식재료로 음식을 준비하고, 사각사각 정성들여 4B 연필을 깎고, 태풍에 큰 수양버들나무가 흔들리고, 짙은 어둠을 마법처럼 밝히던 반딧불이의 유영이 잔상처럼 아련하게 남는다. 마치 내가 그 별장에 있었던 것처럼 그곳의 전경과 정취가 온기 있는 무형의 덩어리로 남는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주인공인 신입사원에게 그 여름이 그토록 깊은 기억으로 가슴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공간을 온 감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몸이라 아득한 공간에서는 몽환적인 시간이 남고 평화로운 공간에서는 서정적인 시간이 남는다. 만약 그가 해발 1000m가 넘는 고요한 숲이 아닌 형광등으로 빛나는 도심 사무실에서 그해 여름을 보냈다면 그의 가슴에는 지금처럼 선명한 무늬가 아로새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을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빛과 어둠의 운율, 매미의 울음소리, 홍차의 맛이 그에게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여름을 선물한 것이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럴 때면 “인간은 집에 있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어떤 책 속 글귀가 떠오른다. 코로나 장기화가 안타까운 건 여러 공간이 닫힌다는 데 있다. 온몸의 세포가 즐겁게 비명을 지르는 여름 해변도, 기지개를 활짝 켜고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던 봄날의 숲도, 두꺼운 500cc 맥주잔을 쨍 하고 부딪치던 호프집도, 장미창으로 쏟아지는 빛과 묵직한 오르간 소리가 좋은 성당도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렇게 하나씩 공간을 잃게 되면 우리에게는 어떤 시간이 남을까? 공간이 선생이 되고, 추억이 됐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처럼 계절의 감각과 냄새가 깊이 각인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타깝다.


정성갑 한 점 갤러리 클립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