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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자유로운 상상과 추리”[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입력 | 2021-08-27 03:00:00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1509∼1511년)에서 그린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왼손에 들린 책이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이 책에서 그는 ‘에우다이모니아’로서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기원전 6세기, 그리스 도시 밀레토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현자 탈레스를 찾아와 조언을 구했다. 어느 날 방문객과 탈레스가 나눈 대화는 수수께끼 놀이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인가요?’ “남에게 조언하는 것.”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그로부터 약 250년 뒤, 가장 어려운 일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떠맡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다른 동물과 어떻게 다른가? 윤리와 정치를 논하려는 철학자는 이런 질문들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해 모르고서 어떻게 인간다운 삶과 사회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연구는 전방위적으로 펼쳐졌다. 그는 학문적 설명, 행동을 위한 계획, 과거의 상기 등 현재, 미래, 과거를 넘나드는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을 분석했다. 하지만 온갖 방향의 정신 활동을 연구한 뒤 그가 내린 결론은 뜻밖에 단순하다. 이미 알려진 것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과학자는 알려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숨은 원인을 찾는다. 정치가는 정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찾는다. 역사가는 현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과 사건을 찾는다. 이 모든 과정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리(syllogismos)’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인간


침팬지, 까마귀 등 동물들도 도구를 사용한다. 침팬지가 호두 껍데기를 깨기 위해 돌을 사용하는 모습.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사람에게만 추리 능력이 있을까? 단정하기 어렵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하는 증거는 많다. 동물의 도구 사용이 한 가지 증거다.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한다. 넓적한 돌에 딱딱한 호두를 얹고 돌망치를 내리치는 침팬지는 돌도끼를 사용한 호모사피엔스와 닮았다. 하지만 겉보기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침팬지의 ‘돌망치’는 사방에 널린 돌 가운데서 취한 자연물이지만, 인간의 돌도끼는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가공물이다. 인간은 단지 자연물을 도구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구를 위한 도구, 즉 2차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에 의해 가공된 도구를 사용한다! 사람 이외에 그렇게 하는 동물은 없다. 어디서 오는 차이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것이 추리 능력에 달려 있다. 호모사피엔스의 돌도끼나 돌칼 제작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무를 깎기 위해서 좋은 도구가 없을까?’란 질문이 상상을 불러내고, 상상은 자연 속에 없는 것을 찾게 한다. 질문과 상상이 없다면 인간은 지금도 침팬지 수준에서 자연물을 이용할 뿐, 도구와 기술의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질문과 상상은 끝이 아니다. 상상 속에 떠오른 것들을 비교해서 그중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내야 한다. ‘왜’ A가 B나 C보다 더 좋은지, 이유도 따져봐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 선택이 이루어지면 그때 비로소 돌도끼 만들기가 시작된다. 침팬지의 돌망치와 비슷해 보이는 돌도끼 안에는 그렇게 질문, 상상, 비교, 정당화 등이 얽힌 추리 과정이 들어 있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슬로 싱킹(slow thinking·느리게 생각하기)’이다. 다른 동물들도 이런 능력이 있다면 왜 2차 도구를 만들지 못할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물에게도 ‘연상’ 능력이 있지만 ‘추리적 상상’은 없기 때문이다.


셜록 홈스를 행복하게 만든 추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사에 관한 철학’은 이렇게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찾는다. ‘아주 높은 뜻의 성공술’이 그 내용이다. 그에 따르면 잘사는 것, ‘에우다이모니아’는 각 개인이 ‘인간으로서’ 타고난 능력을 역량으로 개발해서 이를 충분히 실현하는 삶에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욕망과 자아실현이 중요한 시대에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추리의 대명사 셜록 홈스의 사례를 살펴보자. “여러 가지 가능성을 비교해서 가장 그럴듯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그의 추리의 기본이다. 타고난 능력뿐만 아니라 학습을 통해 개발된 역량이 그를 명탐정으로 만들었다. 사건 현장을 돌아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범죄 사건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그는 이 사건들에 견줘 새로운 사건을 설명할 가설들을 세운다. 그 가운데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가능한 것을 남겨둔다. 이렇게 시작된 추리에 홈스는 미친 듯이 빠져든다. 하루 종일 굶어도, 온갖 위험이 닥쳐도 그는 고단함을 모른다. 그에게 추리와 수사는 타고난 능력과 개발된 역량을 발휘하는 일이고, 그것이 행복이자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홈스도 코카인 주사에 매달릴 때가 있다. 할 일이 없을 때다. 그는 권태와 무력감을 벗어날 수 없다. 만일 할 일이 건물주 되기나 비트코인밖에 없었다면 실력자 홈스는 아예 삶을 끝내려 하지 않았을까?

홈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행복한 삶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호모사피엔스의 능력을 타고났지만 그 능력을 저마다 다른 일에서 실현하고 싶어 한다. 도구 제작, 기술 개발, 사건 수사뿐만 아니라 여행 계획, 글쓰기, 영화 만들기, 작곡하기, 심지어 카드놀이나 거짓말까지 추리가 관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각자 좋아하는 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면 즐겁고 행복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삶은 지겹고 불행해진다. 물론 많은 경우 능력을 잘 실현하려면 역량 개발이 필요하다. 홈스가 추리를 위해 머릿속에 수많은 사건을 정리해 놓듯이.


자기실현으로 얻는 활력


‘에우다이모니아’는 본래 ‘좋은 다이몬이 이끄는 상태’를 뜻한다. 반대는 ‘카코다이모니아’, 나쁜 다이몬에 붙들린 상태다. 악령은 무엇을 할까? 타고난 능력을 발휘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가로막고 잘 못하는 일을 강제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는 먼저 교육부터 장악하려고 할 것이다. 수학적 추리를 좋아하는 학생이 글쓰기를 강요당하면 괴롭다. 글쓰기와 읽기를 즐거워하고 외국어에 관심 있는 학생에게 수학 풀이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하면 더 괴롭다. 게다가 ‘수포자’ 신세를 겨우 면해 대학에 왔는데 이제 ‘문송하다’라는 조롱을 들으며 코딩까지 배워야 한다면, 코카인을 맞아야 하는 홈스 꼴이 되기 십상이다. “여보게, 왓슨, 나한테 능력이 있으면 뭘 하겠나? 키우고 발휘할 기회가 없는데….” 그러니 쓸모와 효용의 강제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역량 개발과 자기실현의 여건이 다양해질수록, (반사회적인 일이 아닌 한) 하고 싶은 상상과 추리의 기회가 늘어날수록, 좋은 다이몬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서 활력을 얻는다.

지난해 대한민국은 세계 표준특허 1위 국가에 올랐다. 하지만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35위다. 하나는 꼭대기, 하나는 밑바닥인데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우리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추리 문제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