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한 아들이 19년을 선수생활 했으니, 소 키우러 안 내려온 걸 뿌듯해하실 거예요. 하하.”
28일 현역은퇴를 발표한 이성열(37)에게 ‘소 이야기’를 하자 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LG 소속이던 프로 초년병 당시 야구가 안 돼 “고향인 순천에서 아버지를 도와 소를 키워야 하나 생각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이성열에게 소 이야기는 연관검색어처럼 회자됐다. 2014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후 찾는 팀이 없자 이성열은 이 생각을 다시 했다고 한다.
이때 ‘사인 앤드 트레이드’ 형식으로 한화에 둥지를 튼 이성열은 아버지를 돕는 대신 2018시즌 한화의 11년 만의 가을무대 진출을 도왔다. 단순히 돕는 게 아니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장을 맡아 동료들을 이끄는 한편 타율 0.295 34홈런 102타점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며 잠재력을 마음껏 뽐냈다. 이성열도 “버티고 버티며 그런 순간도 경험했다. 프로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이었다”고 회상한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던 2018년 본보와 인터뷰할 당시. 동아일보 DB
일찌감치 야구를 포기하고 ‘고향행’을 택했다면 없었을 일. 순천 효천고를 졸업하고 2003년 2차 1라운드 3순위로 LG 지명을 받고 프로무대에 데뷔한 이성열은 185cm의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일발 장타력이 있는 타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가끔 한 가지 능력만 탁월할 때 슬픈 일이 생긴다. 스윙 폼이 커 컨택능력이 안 좋다는 평가도 따랐는데, 잠재력을 터뜨리기 위해 팀을 세 번 옮겨야 했다. 2010시즌 두산에서 24홈런을 터뜨렸지만 다시 20홈런 이상을 치기까지 7년이 걸릴 정도로 기복이 있었다.
현역의 마지막 7시즌을 몸담고 은퇴하게 된 한화는 이성열에게 ‘인생 팀’이 됐다. 2017시즌 21홈런을 시작으로 3년 연속(21개, 34개, 21개) 20홈런 이상을 꾸준히 치며 ‘이성열=거포’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2017시즌에는 교타자의 상징인 ‘시즌 3할’(0.307)도 넘어봤다.
은퇴 전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된 14일 NC전은 이성열다웠다. 한화가 3-7로 뒤지던 3회말 2사 만루에서 타석에 선 이성열은 만루홈런을 터뜨렸고 팀은 9-9로 비겼다. 이성열은 “그냥 여러 번 친 홈런 중 하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돌이켜보니 참 각별한 홈런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 후 수베로 감독으로부터 “여기까지인 것 같다. 고생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이성열은 이튿날부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경기장에서의 마지막이 나쁘지 않았던 이성열도 좋은 추억을 갖고 선수 유니폼을 벗기로 했다. ‘현역 마지막 타석 만루홈런’이라는 진기록을 남긴 채.
타구를 치고 더그아웃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이성열. 동아일보 DB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트레이드’에 대해 이성열은 “리그에 트레이드가 좀 더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19시즌 째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해줬고 KBO리그 통산 56명에게만 허용된 1500경기 출전(이성열은 1506경기)한 선수로도 이름을 남겼다. 이성열은 개인 의견이라면서도 “선수들이 실망할 일이 아니라 자극제가 된다고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내 관점에서는 야구를 포기하고 싶을 때 그런 일(트레이드)이 일어났고 결국 내게 맞는 팀을 찾았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잔여시즌을 한화 퓨처스리그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하기로 한 이성열은 다음주부터 2군 훈련장이 있는 충남 서산으로 이동해 업무를 시작한다. 그는 “야구의 근간이 전력분석이다. 앞으로 많은 부분을 배우겠다”고 말했다.
이성열은 현역시절 삼진을 당하더라도 크게 방망이를 돌리다가 결정적인 순간 홈런을 치며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동아일보 DB
이성열은 현역시절 큰 스윙으로 계속 삼진을 당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홈런을 쳐내 팬들로 하여금 ‘뽕’에 취하게 한다고 해 ‘뽕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현역 선수들의 사회적 물의로 야구에 관심을 접는 팬들을 다시 ‘뽕’에 취하게 할 날이 오길 바란다.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