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에 집착한 무능한 이행 ‘참사’ 현실 외면한 채 조급한 밀어붙이기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포토맥 강변 위로 탁 트인 하늘이 펼쳐지는 미국의 워싱턴하버 상공에 헬기 두 대가 날아들었다. ‘뭔가 긴급히 출동할 사태가 터졌나….’ 백악관과 펜타곤이 가까운 이곳에 울리는 ‘두두두두’ 소리가 이날따라 왠지 더 요란하게 들렸다. 노천카페에서 점심식사를 하다 헬기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불안해 보였다.
이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로 13명의 미군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26일(현지 시간). 워싱턴하버에서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던 사람은 약속시간에 20분 늦었다. 백악관과 의회 주변 경호가 강화돼 주요 도로 진입이 차단된 탓에 교통정체가 심했다고 했다. 9·11테러 20주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 전해진 아프간의 테러 소식이 미국인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불안은 현실이 되고 있다. 아프간 현지에는 곧 추가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는 극도의 긴장감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 즉각 보복 공습에 나서면서 테러리스트들의 재보복에 따른 악순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아프간 철군을 선언한 미국이 역설적으로 테러의 문을 열어젖힌 셈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국익에 반하는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게 바이든 대통령의 오랜 신념이라는 것은 뉴스도 아니다. 문제는 그 신념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고 이행하느냐 하는 것.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판단을 과신했고, 플랜B가 요구되는 급박한 상황 전개에 둔감했다. 탈레반이 순식간에 수도 카불을 점령해 버렸을 때도 그는 휴가를 즐기던 캠프 데이비드에 머물렀다.
참모들의 고언을 외면하고 철군을 조급하게 밀어붙인 것도 위험했다. 군 당국자들은 테러 세력의 부활 가능성과 병력 유지 필요성을 보고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9·11테러 20주년을 첫 시한으로 정했던 것도 패착이었다. 한 외신기자는 “바이든 행정부가 특정 기념일을 염두에 두고 성과로 포장하려는 욕심이 있었던 게 아니냐”며 “철군을 정치 쇼로 만들려 했던 것”이라고 했다.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책임을 지려는 흔적 또한 어디에도 없다. 책임을 추궁하는 폭스뉴스 기자의 질문에 “트럼프가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 때문이었다. 그 내용이 뭔지는 아느냐”며 기자를 윽박지르는 바이든 대통령의 모습은 민망할 지경이었다.
투철한 소신은 리더가 갖춰야 할 기본 자질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신념이 잘못 펼쳐지거나 신중한 현실적 고려 없이 강행되면 잃지 않아도 될 목숨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진다. 정책 결정의 당위성과 정당성이 무너져 버린다. 그 고통은 늘 국민의 몫이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