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북핵 관련 연례보고서 입수 “2년반 가동 징후 없던 5MW 원자로 지난달 초부터 냉각수 배출 등 징후” IAEA “유엔 결의 위반, 매우 유감”
동아일보가 29일 입수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핵 관련 9월 연례 이사회 보고서는 “북한은 2018년 12월 초부터 올해 7월 초까지 5MW 원자로 가동 징후가 없었다”며 이같이 적시했다. 27일 IAEA 이사회에 제출된 이번 보고서는 위성사진 분석 결과 등을 토대로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을 담았다. IAEA는 북한과 이란 등의 핵개발 상황을 감시·사찰하는 국제기구다. IAEA가 올해 5MW 원자로 재가동 징후를 밝힌 것은 처음이다.
보고서는 또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에 증기를 공급하는 화력발전소가 올해 2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5개월가량 가동됐다”며 “이는 이전의 폐기물 처리나 유지보수 활동보다 상당히 긴 기간”이라고 명시했다.
보고서는 평양 인근의 강선에서도 내부 건설 작업이 이어지는 등 움직임이 계속 포착되고 있다고 밝혔다. 강선은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시설 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IAEA는 보고서에서 5MW 원자로 재가동과 방사화학실험실의 5개월 가동이 “새로운 징후(new indications)”라며 “심각한 문제(deeply troubling)”로 규정했다.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며 “매우 유감스럽다(deeply regrettable)”고 비판했다.
北, 영변 핵능력 건재 과시… ‘對美 핵협상 카드’ 재활용 나선듯
北, 영변 핵시설 재가동북한의 핵개발 상황을 감시해온 IAEA가 5MW 원자로와 방사화학실험실 재가동을 “새로운 징후(new indications)”라며 “심각한 문제”로 명시한 것은 그만큼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 IAEA, 플루토늄 추출시설 ‘5개월’ 가동 주목
평안북도 영변의 5MW 원자로는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북한의 핵심 핵시설이다. 원자로에서 꺼낸 폐연료봉을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재처리해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한다. 5MW 원자로와 방사화학실험실은 영변 핵시설 가운데 핵무기에 탑재하는 플루토늄 생산의 핵심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영변 5MW 원자로를 재가동한 것은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거나 이를 외부에 과시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보고 있다. 북한은 2007년 북핵 6자회담 합의에 따라 5MW 원자로 불능화를 약속하고 2008년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한 바 있다. 이후 핵시설 신고와 검증을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하다가 ‘불능화 중단’을 선언한 뒤 2018년까지 가동과 중단을 반복했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인 12월부터 가동을 중단하다가 올해 7월 초 돌연 가동을 재개한 징후를 IAEA가 포착한 것이다.
IAEA 보고서는 특히 방사화학실험실이 2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약 5개월간 가동된 사실을 파악했다. 보고서는 “북한은 1992년 IAEA에 5MW 원자로에서 나오는 전체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데 5개월이 걸린다고 보고했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은 2003, 2005, 2009년에 각각 약 5개월 동안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재처리를 실시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이 기간 동안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이다. 2016년 4월에도 방사화학실험실 가동이 포착된 뒤 5개월 만에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했다. 보고서는 평양 인근의 강선과 실험용 경수로 내부에서도 건설 작업 등이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 北, 美에 ‘영변 카드’ 다시 내미나
북한이 영변 5MW 원자로와 방사화학실험실을 재가동한 것은 북-미 대화 재개를 요구해온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바이든 행정부는 6월 방한한 성 김 대북특별대표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대화하자”는 메시지를 북한에 보냈다. 하지만 북한은 뚜렷한 답을 하지 않은 채 지난달 초 5MW 원자로를 재가동한 것이다.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 가동을 재개한 2월 중순은 바이든 행정부가 뉴욕채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에 “조건 없이 마주 앉자”는 의사를 전달한 때다. 북한은 이때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대화 제의에 응하는 대신에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핵능력은 더 발전한다. 빨리 협상을 재개할 조건을 가져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영변’을 다시 북핵 협상 카드로 내미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 김정은이 직접 나서 “미국이 제재를 일부 해제하면 영변지구의 모든 핵물질 생산시설을 미국 전문가 입회하에 영구 폐기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회담은 결렬됐다.
정부의 북핵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29일부터 미국을 방문해 바이든 행정부 당국자들과 대응 방침을 논의한다.
영변 원자로에 플루토늄 추출 시설… ‘북핵 심장부’
북 핵개발 단지 영변은…영변 핵시설은 북한 핵개발의 ‘심장부’와도 같은 곳이다. 과거 북한 핵위기 때마다 핵물질의 생산 거점이자 최우선 비핵화 대상으로 북-미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조성된 영변 핵시설은 여의도 면적의 약 3배(약 891만 m²) 규모의 부지에 1963년 도입한 소련제 연구용 원자로(IRT-2000) 등 400여 개의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다.
가장 핵심 시설인 5MW 원자로는 영국의 콜더홀 흑연감속로를 모델로 1979년 착공해 1986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이 원자로에서 우라늄을 연소시킨 뒤 나온 폐연료봉(사용 후 핵연료)을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무기급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북한은 2002년 이후 최소 네 차례 이상 재처리를 통해 확보한 플루토늄 일부를 핵실험용 폭탄 제조에 사용했고, 현재 50여 kg을 보관 중인 것으로 한미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미 정찰위성은 5MW 원자로의 열기와 증기 방출 여부 등을 추적 감시하면서 재가동 징후를 파악해 왔다.
방사화학실험실은 길이 190m, 폭 20m의 6층 건물로 폐연료봉에 든 핵물질을 화학적으로 추출하는 퓨렉스(PUREX) 공정을 갖추고 있다. 영변 핵시설에는 2차 북핵 위기를 촉발시킨 우라늄 농축시설도 있다. 북한은 2010년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를 초청해 이 시설을 서방세계에 처음 공개했다.
당시 헤커 박사는 “영변에 설치된 2000개의 원심분리기에서 연간 40kg 정도의 고농축우라늄(HEU)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에 이 시설의 규모를 두 배가량 확장하는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지난해 8월에는 폭우로 영변 핵시설 인근의 구룡강이 범람해 핵시설의 냉각수 공급을 위한 펌프시설 등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은 정황이 포착된 바 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