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병으로 일본군에 복무해 전쟁범죄자(전범)가 됐지만 보상을 받지 못한 조선인들이 우리 정부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에 관해 심리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이 나왔다.
헌법재판소(헌재)는 31일 고(故) 이학래 동진회 회장이 “정부가 한국인 전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5(각하)대 4(위헌) 의견으로 각하 결정했다.
연합국은 지난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 재판을 실시해 동남아시아 각지 형무소에 수감시켰다. 이 중에는 이 회장과 같은 조선인 148명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의해 징병돼 연합국 포로 관리 등을 담당했다는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돼 처벌받았다. 이 회장 등은 일본 스가모(?鴨)형무소에서 형을 살다가 출소했지만 ‘전범’, ‘대일협력자’라는 낙인 탓에 귀국하지 못하고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보상 문제는 해결됐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맺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한일수교회담 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 전범은 별개 문제이니 별도 연구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는 게 문서의 내용이다.
이후 이 회장과 유가족들은 2014년 우리 정부가 한일청구권 협정 3조에 따른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한일청구권 협정 3조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행위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보상 등 문제와 관련해 분쟁이 있을 경우 외교 등을 통해 해결하도록 규정한다.
헌재는 이 회장 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인 전범의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및 원자폭탄 피해자와 성격이 다르다는 게 헌재의 결론이다.
먼저 조선인 전범은 위안부 등과 달리, 일본 정부가 아닌 국제전범재판소에 의해 발생한 문제라고 봤다.
물론 국제전범재판소의 판결 외에 일본의 강제동원으로 조선인 전범이 입은 피해는 있다고 했다.
그러나 헌재는 위안부 피해 보상을 두고 일본 정부가 한일청구권 협정에 관한 다른 해석을 내놓는 등 분쟁이 있었던 반면, 조선인 전범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미 일본은 1950년대 중반께 조선인 B·C급 전범 피해자들에게 위로금 등을 지원했다는 게 결정 근거로 언급됐다.
또 우리 정부가 지난 2006년 B·C급 전범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한 뒤, 일본 의원을 만나 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을 촉구했고 외교 실무자간 회의도 진행했다는 점이 인정됐다.다만, 이석태·이은애·김기영·이미선 재판관은 “한일 양국 간 분쟁이 발생한 상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우리 정부가 조선인 전범을 두고 일본과 협상을 하긴 했지만, 배상청구권에 관해선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헌재 결정 직후 이 회장 측 법률대리인은 “조금 유감일 수 있다”면서도 “4명의 재판관이 우리 정부가 일본과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은 게 잘못된 것이라고 한 부분에 희망을 갖는다. 우리와 일본 정부가 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조선인 B·C급 전범 피해자 중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했던 이 회장은 지난 3월28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숨졌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