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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속의 하이쿠[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입력 | 2021-09-01 03:00:00


“교토에 있을 때도/뻐꾸기 소리가 들리면/나는 교토가 그립다.” 17세기 일본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정형시, 하이쿠(俳句)다. 도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3행 17자로 풀어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하이쿠로 가득한 영어소설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의 맨부커상 수상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 그러하다. 제목마저 바쇼의 기행문 제목을 갖다 썼다.

얼핏 보면 일본 전통문학에 대한 찬사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버마 정글에서 ‘죽음의 철도’ 건설에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인 전쟁포로들이 처했던 실존적 상황을 묘사한다. 일본인들의 잔혹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포로들은 맞아 죽고 굶어 죽고 병에 걸려 죽는다. 어떤 장교는 그 와중에 바쇼의 하이쿠를 읊조리다가 변형시킨다. “만주국에 있을 때도/목을 보면/나는 만주국이 그립다.” 사람을 보면 자신의 칼에 잘려 나갈 목부터 살피는 일본 군인의 모습이 섬뜩하다.

소설에 하이쿠가 나오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아름다움을 광기와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군인들을 광기로 몰아간 것은 당대의 일본 “지식인, 종교지도자, 예술가, 언론인, 정치인이 조장한 이념”이다. 한편에는 하이쿠를 만들어낸 문화가, 다른 한편에는 그것을 욕되게 하는 이념이 있었다. 악질적인 일본 군인들이나 그들의 하수인은 그 이념의 희생자였다. 작가가 만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미안해하고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전쟁포로였던 작가의 아버지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악몽 같은 과거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믿기 어렵지만 실제로 기억이 지워졌다.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인간성과 미안하다는 말에 자유로워진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작가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력을 재현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그들을 증오가 아니라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려고 한다. 너그러운 눈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